강희근 "늘 한 발 앞섰던 시인이었다"
강희근 "늘 한 발 앞섰던 시인이었다"
  • 경남일보
  • 승인 2018.10.0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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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였던 허수경 시인 부고에 보내는 글
허수경을 그리다

“우리 진주출신이며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출신 시인이여! 그대가 있어 국립경상대학교 개교 70주년이 외롭지 않고 그대가 있어 우리 지역대학이 바야흐로 글로벌 대학임을 증명해 주고 있음이여. 부디 유명을 달리하지만 편하고 복된 새로운 세계에서 남겨 둔 작품처럼 영원하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빌어요.”

필자는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회 졸업생 허수경 시인의 부음을 인터넷 뉴스에서 확인하고 가슴이 아파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터에 원고 청탁을 받았다. 청탁은 2시간여 안에 ‘허수경 시인을 그리는 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승이 제자의 죽음을 두고 추모의 글을 쓸 수 있는가, 하고 그 문제만 생각했다. 처지에 따라서는 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만약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혹여 허수경론을 쓰는 연구자에게 일말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허수경 시인은 1964년 진주 장대동에서 아버지 허남벽 교수(경상대 교수·경제과, 희곡작가)의 딸로 태어나 진주여고 평준화 이전 마지막 선발집단으로 입학했다. 그는 대입에서 흔히 말하는 상위학과에 들어갈 능력이 있었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다. 한발 앞서가는 학생이었다.

허수경 시인은 대학 재학중에는 이른바 독서 지하써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적발되기도 했고 방학때에는 어김없이 전국의 앞서가는 문단의 선배들을 방문하고 시대와 역사와 문학에 대한 담론을 통해 교양을 넓혀나갔다. 어느날인가 서울에 있는 필자의 선배로부터 허수경이 다부진 학생이라고 칭찬해 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도 방학때는 시 쓰는 일은 아예 그만 두고 주유천하에 들어갔으므로 그때 필자는 “백담사 부목상자로 있던 만해가 시베리아 8000㎞ 횡단을 꿈꾸고 브라디보스토크에 들렀는데 고려인 청년으로부터 일본인 첩자로 오인받아 하마터면 금각만 바다에 던져지는 참화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수경이도 그런 불상사를 만나면 어찌할까?” 이런 생각까지 한 바 있었다.

허 시인은 동급생 중에서는 동인활동이나 학술활동에 있어 늘 태클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앞서 나아갔다. 졸업논문으로는 ‘신동엽의 금강 연구’를 할 정도였으니 생각하는 바의 착지가 시대와 역사였다. 당시 우리 학과 원로교수는 “허수경이 너무 아망이 세다”고 평가했다. 돌출과 고집이 세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아 졸업논문 제목을 정했는데 그 홀로 제가 정하고 제 논리로 써 내었으니 그런 지적을 받을 만했다.

허 시인은 늘 앞서간다고 한 것처럼 고인 물이 아니었다. 시인이 되어서도 문맥만 다듬고 있는 시인이 아니라 역사 위에서, 시대 위에서, 미학 위에서 무엇인가를 발언하려고 노력했다.

허수경 시인은 어느날 영화에 빠져 필름을 싸서 들고 모교 경상대 국문과로 와서 시청각실을 빌려 후배들을 모아놓고 영화론을 펴고 영화가 시대라는 점, 문화라는 점, 역사라는 점을 강의했다. 욕심이 많아 뒤떨어지는 후배들을 위해 그냥 있지 않은 자상한 선배였다. 그러더니 독일로 유학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고미술사, 고고인류학 등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미학적 상상력까지 가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끝내 고대근동고고학박사를 취득케 되었다.

언젠가 경상대 국문과 대학원을 나온 김이듬 시인이 독일이던가 프라하이던가 문예진흥원 해외 문화탐방 계획에 참가하여 독일에 갔던 차에 허수경 시인 댁에 가서 한 3일 있다가 온 체험을 시로 써놓았던 것을 필자가 읽은 일이 있다. 허수경 시인의 남편은 독일의 교수였고 동양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는 점을 적었다. 같이 이야기했을 때 뭔가는 모르지만 쓸쓸해 했다는 인상을 받았던 바를 김 시인은 시 행간에 지나가는 흔적처럼 기술했다. 필자가 프라하를 두 번이나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그쪽에 대한 김이듬 시인의 시집을 눈여겨 보았었다. 한 번은 항가리에서 프라하 국경 쪽으로 넘어가는데 김이듬 시인은 필자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하여 국제 전화를 해왔다. 필자가 지금 프라하로 들어가는 중이라 하니 너무 좋아했다. 스스로도 프라하로 올 계획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허 시인의 아버지 허남벽 교수는 본격 문인은 아니었지만 필자가 1968년 이후 진주문협 간사로 있을 때 희곡분과 회장이었다. 바지에 주름을 세우고 양복은 늘 새 것으로 입었다. 진주문협의 리명길 교수나 문무연, 구기천 교수, 곽수돈 내과의원 원장 등과 친교를 이뤘다.

허수경 시인은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산문집으로 ‘모래 도시를 찾아서’,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등이 있다. 허수경, 그의 언어는 자유롭고도 순발력이 있어서 슬픔을 말하면서도 ‘킥 킥’하고 웃음을 곁들이는 양면의 그늘을 아우를 수 있었다.


강희근(경상대 명예교수)

강희근 경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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