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과 같다던 모국어도 놓고 영영 떠난 시인
목숨과 같다던 모국어도 놓고 영영 떠난 시인
  • 김귀현
  • 승인 2018.10.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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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 독일서 수목장으로 장례
진주 출신으로 독일로 건너가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해오던 허수경(54·사진) 시인이 말기 위암으로 지난 3일 작고했다. 향년 54세.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를 밟은 허 시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 방송·라디오 작가 생활을 하면서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 외 4편의 시로 등단했다. 그 무렵 그는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하며 시작 생활을 이어나갔다.

지난 1992년 허 시인은 돌연 아무런 연고가 없던 독일로 떠났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고대 동방문헌학 박사과정)를 취득한 그는 이후 지도교수와 결혼한 뒤 25년 간 땅으로부터 캐낸 사유와 타향살이 중의 정서를 작품 활동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기나긴 타국 생활 중에도 시집과 소설, 산문집을 꾸준히 펴낸 허수경 시인은 독일어로 말하면서도 모국어로는 글을 썼다. 그는 글을 쓰는 행위를 ‘언어공동체의 말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언어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은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 시인은 시 외에 소설과 동화, 산문 등 다양한 글을 썼으며 독일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모래도시’,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을 펴냈다.

허 시인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했으며, 지난 2월 출판사 난다의 대표이자 시인 김민정에게 이를 알린 뒤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지난 8월에는 2003년 나온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15년 만에 새롭게 편집해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라는 제목으로 냈다. 이 산문집에는 시인이 쓴 139개의 짧은 산문과 함께 지인에게 쓴 장문의 편지 9통이 담겼다.

김민정 난다 대표는 “지난 2월 시인이 말기 암을 앓고 있다고 알려오면서 단단한 당부가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에 뿌려놓은 글 빚 가운데 손길이 다시 닿았으면 하는 책들을 다시 그러모아 빛을 쏘여달라는 것이었다”고 개정판을 내게 된 배경을 밝혔다. 당시 시인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독일 뮌스터에서 홀로 생을 정리하고 싶다며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내가 누군가를 ‘너’라고 부른다./내 안에서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를 그리움이 손에 잡히는 순간이다.//불안하고,/초조하고,/황홀하고,/외로운,/이 나비 같은 시간들.//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이 책은 그 아름다움을 닮으려 한 기록이다./아무리 오랜 시간을 지나더라도…’(개정판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서문 중)

허수경 시인은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과 2016년 제6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6월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로 제15회 이육사 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고인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장례는 현지에서 수목장으로 치른다. 이달 말께 진주에서 시인의 작품세계와 시인을 기리는 지인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열 예정이다.

김귀현기자 k2@gnnews.co.kr



 
허수경 시인. /사진제공=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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