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덤불 앞에서
들국화 덤불 앞에서
  • 경남일보
  • 승인 2018.10.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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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전 경남도보 편집실장·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다니는 산길에 들국화가 발길을 붙든다. 찬이슬 머금어 꽃잎이 더 맑다. 무딘 눈에도 깔끔한 자태가 청아하다. 서릿발과 맞짱 뜨는 걸까. 큰 산 서리 소식 들리자 피어난 기개가 그야말로 오상고절(傲霜孤節)!

‘도연명의 꽃’이라 했다. “닷 말 쌀 국록 때문에 향리 소인에 허리 굽힐 순 없다”며 마흔한 살에 귀거래사 앞세워 전원으로 돌아간 그였다. 울타리 아래 국화꽃을 따면서 남산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 눈빛은 어떠했을까. 욕망도 적의도 아닌, 국화와 술을 벗하는 이의 평온한 안빈 아니었으랴.

도연명이 즐긴 국화가 들국화였을까. 문득 엉뚱한 물음이 다가온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구절초였을까, 쑥부쟁이였을까. 천고의 시인은 그 분간을 잘했을까.

들국화는 산야에 자생하는 국화과 식물의 총칭이다. 특정의 화초가 아니란 거다. 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와 벌개미취와 별꽃 감국(甘菊) 산국(山菊)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뭉뚱그려 들국화라 부른다.

작가 김정한은 생전 ‘이름 모를 꽃’이란 표현에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글을 쓰려면 낱낱이 찾아서 이름을 밝히라고 가르쳤다는 거다. 안도현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 못한 자신을 꾸짖는 시 ‘무식한 놈’을 썼다. 해서 나는 연전부터 이 꽃철이면 도감을 뒤졌지만 결국엔 허우적댔다.

인터넷에도 식별 법은 숱하게 올라 있지만 설명과 사진들을 대조해 보면 제각각이고 뒤죽박죽이다. 올바른 식별이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다. 결국 나는 구별을 포기했다. 들국화로 알고 있기로 한 거다. ‘들국화’가 그리 거북한 이름도 아니지 않은가. 책임 없는 인터넷에 기대어 어정쩡히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들국화가 낫지, 싶기도 하다.

옛사람들이 약에 쓸 구절초 꺾은 중양절(17일) 무렵이다. 들국화 제철인 거다. 보살피는 손길 없이도 철 되면 하양 보라 연분홍 따위로 색색이 피어나는 꽃. 우리가 그 구별을 제대로 하건 못하건 오불관언, 산과 들엔 지금 국향이 그윽하다.

들국화 덤불 앞을 어서 떠나지 못한다. 삶이 찌질한 나도 한번 도연명처럼, 들국화처럼 늠연(凜然)해지고 싶은 이 가을이다.

<삼짇날/ 지지배배 제비 오던 길/ 세 마디 들풀로/ 웅크리고 있던 너.// 시월의 들녘에/ 아홉 마디 줄기로/ 별처럼 피었구나.// 구절초 흐드러진/ 바람 언덕에/ 하얗게 이우는 늦가을 햇살. // 어느새 돌아오는 다른 계절에/ 구절초 성긴 마디마디에/ 따스한 온기로/ 머물고 싶다 하네.>(최해춘 ‘구절초’)
 
정재모(전 경남도보 편집실장·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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