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빼떼기와 애플데이
사과 빼떼기와 애플데이
  • 경남일보
  • 승인 2018.10.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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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사과는 왜 제사상 필수 과일에 들지 않을까. 제사상 차림의 상식 같은 어동육서(魚東肉西)를 들먹일 때면 세트로 따르는 게 조율이시(棗栗梨枾)다. 꼭 올려야 하는 과일이 대추 밤 배 감이라는 거다. 붉은 과일은 동쪽에 차리고 서쪽엔 흰 것을 놓으라는 홍동백서 진설법도 엄연하다. 붉은 과일의 대표는 사과일 듯싶은데 제사상 차림표에는 없다.

사과를 가리키는 한자로 우리는 ‘沙果’를 쓰고, 중국에선 평과 또는 빈파(瀕婆)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과일을 지칭하는 단자(單字)는 찾을 수가 없다. 대개의 과일은 이름 격의 고유 글자를 갖고 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선악과가 이것이므로 인류와 함께 해온 과일이 사과다. 맛 또한 ‘조율이시’에 손색이 없다.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는 사과가 고유 한자를 못 가진 까닭을 이렇게 풀었다. ‘이름이 없다는 건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이 없다는 것이다. 오래 전엔 중국에 없었던 거다. 우리나라엔 19세기 말 중앙아시아에서 도입됐다’(우리 음식의 언어). 사과는 1892년 미국 선교사가 들여와 대구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655년 인평대군이 연경에 사신 갔다가 가져왔다는 설도 있지만 야사일 뿐이다.

조율이시에 못 끼었다 해서 사과가 우리네 제사상에 빠지는 법이 없다. 개인적 기억 한 토막. ―어린 날 한밤중 집안이나 이웃에서 온 제삿밥에는 사과가 꼭 있었다. 그런데 그건 반으로 쪼갠 뒤 절간(切干)고구마처럼 껍질째 두께 5밀리 정도로 얇게 썬 ‘빼떼기’였다. 제상에 올렸던 서너 개로 제삿밥을 도르는 집집이 고루 나눠야 했기에 달리 도리가 없었으리라.

얄팍히 썬 그 사과 조각의 시금한 미각 향수에 덧붙어 떠오른 최근 뉴스 한토막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사립유치원들의 온갖 비리 사건 말이다. 어떤 유치원에선 사과 한 개를 12~15 조각내어 원생들에게 나눠 먹였단다. 옛 가난한 제삿밥 함지에 담겨온 빼떼기 사과엔 따듯한 인정이 스며 있었다. 정부 보조금 받은 이들이 아이들 먹일 과일값 떼어서 명품 가방· 흙침대 사고, 703만 원짜리 피부 관리 받고, 성인용품 사고, 노래방도 갔단다. 기가 찰 일이다.

모레(24)가 애플 데이다. ‘사과의 날’인 거다. UN 데이가 아직도 공휴일인 줄 아는 세대에겐 생소하리라.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이 저마다 사과(謝過)하는 뜻에서 제철 맞은 사과(沙果)를 주고받으며 화해하는 날이란다. 아이들 먹거리 값 떼먹은 어른들, 내일의 주인공들에게 조아려 사죄하고 참회하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할 날이겠다.

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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