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 <2>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 <2>
  • 경남일보
  • 승인 2018.10.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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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의 안수산

인물의 역사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인물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인물 안수산을 기억함에 있어서 우리는 중첩된 차별과 억압을 극복하고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된 그의 성취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가졌던 그의 역사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안수산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도전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의 동인이 무엇일까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 인물의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이 하나의 원인으로만 귀결되어질 리는 만무하기에 성장기의 그의 모습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안수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미국 한인 공동체 속에서 안수산의 삶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여러 기관과의 인터뷰와 보도자료, 그리고 전기 등을 통해 성장기의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의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유추해 보았다.

▲ 1936년. 당시 21살이었던 안수산 여사의 모습.



안창호 선생은 51번, 안창호 부인 이혜련은 52번이라는 미국의 비자를 받아 미국 땅에 도착한 최초의 한국인 부부였다. 이 신혼부부는 죽어가는 나라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줄 미국의 교육체계를 배워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1902년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안창호 부부를 비롯한 미국 본토에 자리 잡은 한인들의 생활환경은 열악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안창호는 학업을 보류한 채 동포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매진했다. 안창호는 북미 최초의 첫 한인 공동체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미국 한인사회 내에서 안창호의 역할은 국내에서의 애국 계몽운동이나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못지않게 탁월했다. 이러한 안창호의 지도력은 초기 미국 한인사회가 소수민족 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대외적인 그의 활동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는 1902년부터 192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 거주했다. 첫 번째가 1902년 10월부터 1907년 1월까지이고 두 번째는 1911년 9월부터 1919년 4월까지이며, 세 번째는 1924년 12월부터 1926년 3월까지이다. 안수산과 그의 형제들은 안창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미국에 머무르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들은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린 미국 한인 공동체 집단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인 2세들이었다. 안수산이 11살이 되던 1926년 3월 안창호가 상해로 떠난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가장이었던 남편과 아버지를 영원히 만날 수 없었다. 안창호가 미국 한인 공동체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시기와 일제에 강점된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있던 동안 그의 가족들이 겪었던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 자료에서 상세히 드러나 있다. 안수산은 생전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집을 비웠다.

안수산이 태어나기 전에도 안창호는 한인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고 일본의 보호국이 된 조국을 되찾는 일이 우선이었다. 안창호가 미국 내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서 여러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바빴던 시기에 아내 이혜련 여사는 장남 필립을 혼자 출산해야 했다. 당시 이혜련 여사는 병원에 입원할 비용도 없고 조산원을 부를 처지도 못 돼 교회 구제회관에서 해산을 했다. 안창호가 마지막으로 미국을 떠난 이후에도 이혜련 여사는 대외적으로 바쁜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타국에서 홀로 가정을 지켰고 다른 사람들의 집안일을 해주면서 어렵게 가계를 꾸렸다. 장남 필립 안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생업에 바쁜 어머니를 돕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해야만 했다. 이혜련 여사는 다른 사람들의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생계를 위해 장남 필립과 함께 과일 판매 노점상을 했고 수산과 수라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었다. 필선 또한 필립의 일을 도왔고 모두들 야채 트럭의 운전석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막내 필영은 그때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안수산이 성장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운 환경은 그의 책임감 있고 강인한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성장기에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환경적 어려움을 온 가족이 다 같이 극복하며 자랐기 때문에 좀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판단은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산이 성장하던 20세기 초반의 미국 한인 공동체에는 가부장적인 한국전통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안수산은 가부장적 사고를 하는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나 존경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안수산의 말에 따르면 이혜련 여사는 수년 동안 줄곧 리버사이드에서 하녀, 요리사, 청소부, 재봉사로 일했다. 그는 남편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 일하도록 운명 지어진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것과 같은 가족의 일을 돌보도록 선택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의 감옥에 갇혀있었고 결국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안수산과 그의 형제들은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이에 안수산은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감사와 무한한 존경심을 항상 표현했고 이는 그의 전기와 여러 인터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도산이 미국에 머무를 때나 아닐 때나 그의 집은 항상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한인들의 모임의 장소였다. 나라를 잃어버린 2000여 명의 한인들에게는 그곳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인물은 이혜련 여사였다. 그는 좋든 싫든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중심지를 이끌고 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요일이면 모든 한인들이 그 집에 몰려와 밥을 먹었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안수산은 2000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물론, 한평생 고생 속에서도 원망 한마디 없이 자식들에게 아버지를 자랑스러운 분으로 기억하게 해준 우리 어머니도 진짜 애국자였다”고 말하면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존경받을 인물임을 강조했다. 그의 열망 때문이었을까? 이혜련 여사는 남편 안창호의 독립운동 뒷바라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고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음으로써 미국 지역 여성독립유공자 13명 중 1명이 됐다.


 

▲ 1929년 LA피구로아 106번지 뒷마당. 왼쪽부터 안수라,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 안수산, 밑에 남자아이는 안필영. 도산은 1926년 상하이로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다.(몇 번의 수감 생활 후 1938년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안수산은 늘 어머니의 강인함을 존경하는 딸이 느끼는 유대감을 표현했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항상 자신의 롤 모델은 어머니라고 말했고 자신이 유년 시절에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안수산이 항상 표현하는 것처럼 그가 자신의 삶에 주도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가정에서나 한인 공동체 내에서나 늘 강인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민 온 부모들이 고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가족처럼 함께 자랐다. 아이들은 재빨리 점심을 먹고 나서 뒤뜰이나 공터에서 야구를 했다. 오빠 필선을 제외하면 아이들 중에서는 안수산이 맏이였으므로 그는 아이들을 이끌어야 했다. 당시의 모든 한인 2세대들은 형제자매처럼 지냈고 각자에 대해 모두가 잘 알았기 때문에 매우 편했다고 안수산은 회고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10대였던 어느 날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에게 소풍을 가자고 한 뒤 도시락 박스에 벽돌과 흙을 포장해서 넣고 남자아이들이 그것들을 공원까지 옮기게 했다는 일화였다. 일화를 소개할 당시 안수산은 84세의 노년이었지만 “God, we were so bad”라고 하면서 장난기 많은 10대 소녀처럼 웃었다.

그들의 집이 미국 한인들의 또 다른 집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다는 사실은 안수산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시의 한인들이 이러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던 환경 덕분에 그는 아시안 이민 2세대로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눅 들지 않았고 백인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수산은 스스로 자신의 성격은 아버지 안창호의 교육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생존 당시 LA TIMES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도산 안창호는 한국적 표준으로부터 유난히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그의 딸들이 ‘여성적이 아니라 거칠게’ 자라나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아버지는 가정에 부재했지만 그의 양육철학은 딸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안수산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안창호는 한국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도 자유로운 사고를 했을 가능성 크다. 그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야구선수로 활동을 하거나 군대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버지의 자유로운 양육 철학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형성된 미국 한인 공동체의 중심적 인물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안창호의 딸로 태어난 안수산은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길러진 책임감,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존경, 한인 공동체 2세대로서의 역할, 그리고 아버지의 교육철학 등의 영향으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의 인물로 성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체적 성격이 이후의 그의 성취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훌륭한 인물의 성취를 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은 특별한 인물로 타고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안수산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안수산은 독립운동가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훌륭한 인물이 되었어야 한다는 편견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는 어쩌면 독립운동가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안수산의 성취를 높이 평가해야하는 이유는 그가 젠더적 인종적 차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면서도 그 모든 상황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글=박현순·사진제공=필립 커디(안수산 여사의 아들)


박현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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