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위의 소확행 한 켜
해파랑길 위의 소확행 한 켜
  • 경남일보
  • 승인 2018.11.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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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지난주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갯길을 한나절 걸었다. 초등 동창 스무남은 명이 야유회를 즐긴 거다. 남해와 동해의 갈림점이라는 미포 방파제에서 출발하여 달맞이공원을 거쳐 동해안 청사포까지 두 시간 남짓한 산보였다. 거창하게 말하면 해파랑길 한 토막을 트레킹한 거다.

해파랑길은 동해안 탐방로 명칭이다. 동해의 상징인 태양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을 담았단다. ‘해+파란 바다’란 건데, ‘바다(해海)+물결(파랑波浪)’이란 중의(重義)도 담긴 걸로 알고 있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철책선 앞 통일전망대까지 770km의 국내 최장 오솔길이다.

숲길 들머리 나뭇가지에 패널로 매달린 시 한 편이 달맞이길 산책객을 맞는다.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고 운을 떼는 박진규의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다. 숲길로 들어서자 신선한 공기가 전신을 휩싼다.

거센 바람에 물결이 에북 높다. 우측 아래 그 풍랑 굽어보며 걷는 산허리 길 언덕엔 가을꽃이 환영 인파처럼 도열해 피었다. 해국(海菊)과 야생 털머위의 노란 꽃떨기가 간지러운 듯 살랑거린다. 군데군데 노랗게 무리 지은 이고들빼기 잔꽃들도 깜냥껏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달맞이고갯길의 딴 이름 문탠(Moon-tan)로드는 선탠을 패러디한 조어다. 이곳엔 동해남부선 일부를 이설하면서 생긴 폐선 구간도 있다. 달 없는 한낮이지만 그 침목 밟으며 천천히 걷는 재미도 예스럽다. 레일바이크 코스라도 짓는가. 뭔가 공사 중이다.

청사포 빨간 등대에 이르러 자리를 폈다. 여덟 살에 만나 6년을 함께했던 벗들이다. 흩어진 이래 오십 수년을 띄엄띄엄 얼굴 보며 살아온 옛 벗들과 먹는 도시락이 각별하다.

삼삼오오 어울려 송정해수욕장 쪽으로 더 걷는다. 사십 년 전 즐비했던 조개구이집들은 여전했고, 바다 위 허공으로 사뭇 뻗어나간 청사포 다릿돌전망대라는 구조물도 만난다. 거기 무명의 4인조 걸 그룹 공연이 벌어져 있었다. 짧은 치마에 살품 깊은 코르셋 차림으로 흔드는 하얀 춤과 노래에 섭슬렸으니 망외의 호사다.

송정(松亭)까지 못 걸은 아쉬움은 청사포 망부송과 해마루 정자의 풍광으로 달랬다. 그림보다 훨씬 더 그림 같은 절승이다. 경치에 연신 감탄하면서 이날 심중에 쟁인 건 오솔길 걷는 희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요샛말로 소확행(小確幸)을 또 한 켜 해파랑길 위에서 쌓은 셈이다. 그러고 보니 소확행이야말로 진짜 큰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 하루를 주선한 부산의 옛 벗들이 무지 고마운 올가을이다.

 

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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