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본군과 일전을 앞두고 그동안 준비한 지휘계통의 혼선을 우려한 김시민은 “성 밖에 계시면서 진주성을 원병해 달라”며 입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주성에 입성할 경우 상급자인 유숭인에게 성의 지휘권이 돌아가 그동안 준비한 모든 계획이 무위에 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 밖에 주둔하면서 인근 의병과 합류해 일본군을 견제하는 전략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이를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의병장 곽재우가 이런 계책이 바로 진주성을 온전히 지킬수 있는 방법이니 이는 진주사람의 복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진주성이 얼마나 치밀하게 일본군과의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각종 기록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의 기록을 보면, 김시민은 1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대포의 재료인 염초 510근과 총통70자루를 제작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다양한 대포를 보유했다는 점이다. 200여 개의 조란탄을 발사할 수 있는 지자총통은 사거리가 약 800보(1㎞)에 달했다.
조란탄 100개와 사거리 1200보(약 1.6㎞)의 천자총통, 사거리 약 1㎞에서 최대 1.9㎞에 달하는 현자총통 등 위력적인 대형화기를 갖추고 있었다.
대포는 여러 단계를 거쳐 발사되기 때문에 평소 쏘는 과정이 숙달되어야 한다. 이 대포가 진주성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시민이 지휘했던 진주성 군사들은 잘 훈련받은 군대라는 것을 증명한다.
진주성 내에 설치돼 있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순서대로)이다. 천자총통은 크기가 가장 커 대장군전 같은 대형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고,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은 천자총통 보다 작은 크기의 총통이지만 대형 화기 중에는 전쟁터에서 활용도가 가장 높았다. 조선의 총통은 천자문의 순서인 천(天), 지(地), 현(玄)에 따라 화포의 크기를 구별했다.
진주성 자체도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 야트막한 야산 정도의 산이지만 그위에 성을 축조함으로써 야산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했다.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강에서 성으로 오는 길은 절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사가 있었다.
성곽 둘레에는 해자와 늪지대가 있어 공략이 여의치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편에 하륜(1347~1416)이 쓴 기록에 따르면 진주성의 이름은 촉석성이고, 그 규모는 둘레가 4359척, 높이는 15척으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이라 할 수 있고, 돌로 축조한 석축성이다.
진양지(1622∼1632)의 기록을 보면 관찰사 김수가 전투가 일어나기 전 1591년에 동쪽으로 성을 더 크게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진주성을 3만의 일본군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진주성에는 일본군의 노략질에 갈곳을 잃은 수만의 백성들이 피난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