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2)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2)
  • 임명진
  • 승인 2018.10.18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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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일본군이 진주성을 향해 서부경남으로 밀려오자 경상우도(서부경남)의 육군 최고지휘관인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이를 방어하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다.

일본군은 3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김해, 창원, 함안을 거쳐 진주로 쳐들어왔다.

때는 1592년 10월 초, 진주성 인근 한 들판에서 유숭인 부대는 다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압도적인 적 병력에 유숭인 부대는 겹겹이 포위 당했다.

최후를 직감한 유숭인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숭인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2400여 명의 조선군이 일제히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칼을 빼든 유승인이 말을 타고 선봉에 섰다. 사천 현감 정득설과 가배량(지금의 거제) 권관 주대청 등을 비롯한 용맹한 장수들과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조선군은 수많은 적을 무너뜨리고 미친 듯이 싸웠지만 하나둘씩 서서히 쓰러져 갔다.

우뢰와 같은 일본군 조총부대의 일제 사격소리가 들판을 메웠고, 이날 전투에서 유숭인을 비롯한 조선군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진주대첩 당시 일본군이 김해에서 진주까지 침략해온 경로. 지도는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일부(18첩 1~3면, 19첩 1~3면).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날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숭인이 말을 달려 진주성 아래에 이르러 성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시민이 성의 주장이 바뀌어 작전 지휘에 효과를 발휘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입성을 거절했다

이에 유숭인이 돌아가다 적을 만나 패하여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거제도)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유숭인 부대가 언제 전투를 치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입성을 거절당한 것은 진주성 전투 이전이기에 10월 초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함안군수 때 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싸웠다.

같은 해 6월 곽재우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일본군을 격퇴하고, 진해에서 이순신 휘하의 함대와 합세하여 적을 무찔렀다.

7월에는 금강을 거슬러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직산현감 박의와 합동으로 대적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특진했다.

직계상으로는 종 2품인 경상우병사인 유숭인이 정3품 목사인 김시민 장군보다 상급 지휘관이다.

하지만 일본군과 일전을 앞두고 그동안 준비한 지휘계통의 혼선을 우려한 김시민은 “성 밖에 계시면서 진주성을 원병해 달라”며 입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주성에 입성할 경우 상급자인 유숭인에게 성의 지휘권이 돌아가 그동안 준비한 모든 계획이 무위에 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 밖에 주둔하면서 인근 의병과 합류해 일본군을 견제하는 전략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이를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의병장 곽재우가 이런 계책이 바로 진주성을 온전히 지킬수 있는 방법이니 이는 진주사람의 복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진주성이 얼마나 치밀하게 일본군과의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각종 기록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의 기록을 보면, 김시민은 1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대포의 재료인 염초 510근과 총통70자루를 제작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다양한 대포를 보유했다는 점이다. 200여 개의 조란탄을 발사할 수 있는 지자총통은 사거리가 약 800보(1㎞)에 달했다.

조란탄 100개와 사거리 1200보(약 1.6㎞)의 천자총통, 사거리 약 1㎞에서 최대 1.9㎞에 달하는 현자총통 등 위력적인 대형화기를 갖추고 있었다.

대포는 여러 단계를 거쳐 발사되기 때문에 평소 쏘는 과정이 숙달되어야 한다. 이 대포가 진주성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시민이 지휘했던 진주성 군사들은 잘 훈련받은 군대라는 것을 증명한다.
진주성 내에 설치돼 있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순서대로)이다. 천자총통은 크기가 가장 커 대장군전 같은 대형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고,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은 천자총통 보다 작은 크기의 총통이지만 대형 화기 중에는 전쟁터에서 활용도가 가장 높았다. 조선의 총통은 천자문의 순서인 천(天), 지(地), 현(玄)에 따라 화포의 크기를 구별했다.

진주성 자체도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 야트막한 야산 정도의 산이지만 그위에 성을 축조함으로써 야산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했다.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강에서 성으로 오는 길은 절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사가 있었다.

성곽 둘레에는 해자와 늪지대가 있어 공략이 여의치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편에 하륜(1347~1416)이 쓴 기록에 따르면 진주성의 이름은 촉석성이고, 그 규모는 둘레가 4359척, 높이는 15척으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이라 할 수 있고, 돌로 축조한 석축성이다.

진양지(1622∼1632)의 기록을 보면 관찰사 김수가 전투가 일어나기 전 1591년에 동쪽으로 성을 더 크게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진주성을 3만의 일본군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진주성에는 일본군의 노략질에 갈곳을 잃은 수만의 백성들이 피난해 있었다.


임명진기자·박현영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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