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3)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3)
  • 임명진
  • 승인 2018.10.18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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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 진주성 북장대에서 바라본 말티고개


진주성 전투의 일별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실린 김성일의 장계, ‘치계진주수성승첩장’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했다.

문헌은 당시의 상황을 ‘정찰의 성격을 띤 왜적의 기병 1000여 명이 진주 동쪽의 마현 북쪽 봉우리에 올라 진주성의 형세를 살피고 말을 요란하게 달리며 그 세를 과시했다’고 적고 있다.

유숭인 부대의 격전이 벌어진 뒤 1592년 음력 10월5일 아침이 밝았다. 동녘에서 먼동이 터오자 일본군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병의 급한 보고에 김시민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급히 성루에 올랐다. 진주성 동쪽의 마현(지금의 말티고개)에 말을 탄 적들이 출몰했다. 진주성을 염탐하러 나온 적 기마 척후부대였다.

일본군의 모습을 본 조선군은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화살 한 대라도 쏘지 마라.” 김시민은 성 중에 전령을 내려 적을 보아도 못 본 체 하고 함부로 대포와 화살을 허비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성안의 기병 500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힘차게 돌진하게 하니 곳곳에서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 17세기 경상도 진주목의 다양한 정보를 기록한 읍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


조선군의 병력은 불과 3800여 명. 일본군 병력의 10/1 수준에 불과했다. 병력이 절대열세인 것을 감추기 위해 김시민은 휘하 장수들에게 성안에 큰 용을 그린 깃발을 세우고 휘장과 장막을 성내 곳곳에 설치했다. 성 안에 있던 백성들 중 노인과 여자들에게도 남복을 입혀 군사의 수가 많아 보이게 했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와 여기저기 세워진 휘장과 장막, 남복을 입은 백성들을 본 적군은 진주성의 병력이 예상보다 많다고 여겼다.

1차 전투 당시 일본군 병력은 3만여 명. 김시민의 기만전술이 통한 탓인지 일본군은 이 병력으로 병력을 분산하는 대신 동문과 구북문 등 2, 3곳의 방면에서 집중해 공격을 펼쳤다. 이 덕분에 조선군은 열배가 넘는 적을 맞아 병력을 집중해 운용할 수 있었다.

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공격로는 2차 전투와는 확연히 달랐다. 10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2차 전투 당시의 일본군의 공격로는 그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이뤄졌다.

 
▲ 조선 후기 경상도 군현을 표시한 경상도지도. 진주가 부산 방면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전시


진주성의 동향을 살핀 적의 무리는 이 날 신시(오후 3시~5시) 무렵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김시민이 곧 날쌔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적을 염탐하게 하니, 일본군 3만여 명이 진주 동편 10리에 있는 임연대 근처에서 결진하고 있었다.

‘임연대’가 지금의 어느 곳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진양지’에 따르면 임연대는 지금의 진주시 도동 동쪽 영천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 부근쯤이라고 보인다.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지승종 교수가 펴낸 ‘임진왜란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양지 등의 각종 기록을 살펴 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속사리의 강변 절벽 위 어디쯤에 있었던 정자로 추정했다. 임연대 근처에 결진한 일본군의 위치는 현재의 문산읍 진주종합경기장 근처 강변 일대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일본군의 대부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진주성에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 진주성 외곽에는 의령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망진산 방면에 조응도, 정유경, 말티고개 방면에 심대승, 윤탁, 곤양 방면(사천)에 정기룡, 조경형, 단성 방면(산청)에 김준민, 윤경남, 최경회 등의 의병부대가 산개하고 있었다. 이들 의병의 존재는 일본군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일본군은 진주성이 자신들의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고 괴롭히는 의병들의 거점이라고 여겼다.

 

장일영 진주성 문화관광해설사는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의병장 김천일은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호남지역 의병들도 대거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필사적으로 싸워 일본군의 호남진출 야욕을 저지했다”고 말했다. 일본군에게 진주성 공략은 단순한 전라도의 곡창지대 확보 차원을 넘어 후방을 괴롭히는 의병들을 제거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진주성 전투 개전 첫날은 그렇게 서로의 전력을 가늠해 보는 탐색전으로 막을 내렸다.

글=임명진·그래픽=박현영기자

제1차 진주성 전투 양측 병력 비교

 
조선군 및 의병 왜장 및 병력
조선군 진주목사 김시민  하세가와 히데카즈 5000여 명
판관 성수경(동문 방어 담당) 나가오카 다다오끼 3500여 명
곤양군수 이광악(100명을 거느리고 합류) 기무라 시게코레 3500여 명
전만호 최덕량(구북문 방어 담당) 오노끼 시게까스 1000여 명
권관 이찬종 가토 미쓰야 1000여 명
군관 이 납(구북문 방어 담당) 마끼무라 세이겐 750여 명 
군관 윤은복 오카모또 시게마사 500여 명
성창현감 강덕룡 등 3800여 명 가쓰야 다케노리 200여 명
의병부대 곽재우, 최강, 이달, 최경회, 조응도, 조경형, 임계영, 정기룡, 정유경 등 3700여 명 오따 가즈요시 120여 명 등 
약 3만여 명
병력 수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일본측 기록은 2만명 기록, 진주성 주민은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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