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4)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4)
  • 임명진
  • 승인 2018.10.1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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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1592년 10월6일 아침, 3만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첫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은 말티고개와 진주향교 뒷산 부근, 또 일부는 진주관아 객사인 봉명루(의병루) 앞에 포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강이 있어 건너지 못하는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그외 진주성 주변의 각 봉우리마다 일본군이 둘러싸듯 포진하며 그 군세를 과시했다. 성 안에서는 그 모습이 마치 벌떼가 진을 치고 개미떼가 모이는 것과 같았다.

당시 일본군의 형세를 ‘난중잡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적은 일제히 말을 타고 마구 달려왔는데, 긴 자루가 달린 둥글고 금빛 나는 부채를 휘두르는 자도 있었고 흰 바탕에 누런 무늬의 금부채 그림에 여러 가지 채색을 섞은 것도 있어 바람결에 펄렁거리므로 광채가 번쩍번쩍하였습니다.

닭의 깃으로 갓을 만들어 쓴 자도 있었고, 머리칼을 풀어 탈을 쓴 자도 있으며 뿔이 돋친 금탈을 쓴 자도 있어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므로 살기가 하늘에 닿았으며 기괴한 형상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고 의심하게 하였나이다’


적의 선봉은 동문 밖 봉명루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1000여 명의 일본군들이었다.

성안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아대며 공격을 시작했다. 이윽고 3만의 일본군이 세 방향에서 산을 뒤덮고 새카맣게 들판을 메우며 성을 향해 쳐들어 왔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지만 진주성에서는 일체의 반격도 나오지 않았다. 성곽 뒤에 몸을 숨긴 조선군은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 순간 지금까지 숨죽인 채 있던 조선군이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김시민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대포가 불을 뿜고 화살이 비가 오는 듯 하늘을 수놓았다.


조총의 사거리보다 긴 대포와 화살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공세가 이어지면서 피해가 커지자 일본군은 인근 마을에서 판자나 대문 등을 뜯어와 성 밖 100보 밖에 벌여 세워놓고 그 뒤에 숨어 조총을 쏘아댔다.

낮 동안의 수차례의 공방전은 밤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성 주변에 군막을 짓기 시작했다.

성 주변의 민가를 노략질하면서 판자나 마루판 등을 뜯어와 짚과 풀을 섞어 지었는데 그 길이가 6~7리(약 2500미터)나 길게 뻗쳤다.

이름 있는 적장은 마을의 향교로 들어가 거처하거나 마을에서 규모가 큰 집에 머무르는 자도 있었다.

각종 군수물자를 실은 소와 말이 이날 오시(오전11~오후1시)부터 어둡기까지 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초저녁이 되자 일본군은 곳곳에서 피리를 불어대고 크게 함성을 질러대며 진주성을 압박했다.

그 소리는 한 식경(30분 가량)이 지난 후에야 그쳤다. 조총을 쏘는 소리는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진주성의 성벽. 당시 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곳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활을 쏘며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조선군도 반격을 가했다.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려졌다.

이날 밤 곽재우가 보낸 심대승이 군사 200여 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 향교 뒷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고 횃불을 들어 흔들었다. 진주성안의 군사들도 이에 응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크게 놀란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으로 오인하고 급히 산에 군사를 보내 추적에 나서는 등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임진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고성의 최강, 이건이 밤에 병사들에게 횃불을 줄이어 피우게 하고 성안의 북소리에 호응하여 북을 치게 하니 그 소리가 산을 진동시켰다. 곽재우의 부하 장수 심대승과 200여 명의 병사들이 큰 소리로 홍의장군 곽재우는 호남의 병사와 연락을 취했다. 곧 도착할 것이다고 말했다. 왜적은 크게 놀랐다’라고 적고 있다.

지형, 지리에 능숙한 의병들은 진주성 외곽 곳곳에서 수시로 치고 빠지는 기습공격을 펼치며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기세 좋게 공격을 펼치던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군의 견고한 방어와 의병의 교란작전. 진주성을 둘러싼 전황은 압도적인 우세를 자신했던 일본군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새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의 팽팽한 접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글=임명진·그래픽=박현영기자

 
국립진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난중잡록.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썼다./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난중잡록.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썼다.
국립진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쇄미록. 임진왜란 당시 오희문이라는 민간인이 9년 3개월에 걸친 피란일기. 사료적 가치가 높고 전투와 함께 생생한 당시의 모습을 일기로 남겼다./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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