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3>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3>
  • 경남일보
  • 승인 2018.11.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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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적 편견을 극복한 여성군인 안수산
▲ 1943년 안수산 여사(맨 오른쪽)가 동료 여군들과 함께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그간 우리에게 알려진 안수산에 관한 이력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해군에 자원해 아시안 여성 최초의 미국 해군 장교와 미국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다는 것, 해군통신본부(Op20G)에서 암호해독 전문가로 활동한 이후 대위로 예편했고 1946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 소비에트 전담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약했다는 것, 그리고 국가 기관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인 2세대들을 위한 교육을 통한 봉사로 여생을 보냈다는 것 등이다. 미국 사회는 이미 그가 당시 차별받는 아시안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해군에 입대했고 아시안 여성 최초의 해군 장교, 미국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됨으로써 다인종 국가인 미국 사회의 통합에 기여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안수산의 삶의 이력은 여성의 삶의 조건이 확연히 바뀌어 있는 현대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과연 화려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성취를 아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가 인물 안수산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사회가 인물 안수산의 성취에 주목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 사회는 그의 성취를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살았던 당시의 미국 사회의 보편적 젠더 인식을 이해하고 쉽지 않았을 그의 선택들을 다시 들여다보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여성들은 이미 여성 군인과 같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벗어난 분야에서의 활동을 경험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국가는 여성들에게 다시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했고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고, 전쟁은 미국 여성들이 다시 한번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2년 안수산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웨이브(WAVE)부대의 장교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나 사병으로 다시 지원해 해군이 됐다. 그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 되고자 했던 큰 요인 중 하나는 미국의 국가적 정책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 군인을 모집했다고 해서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고정 관념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안수산이 입대할 당시 미국의 주류사회는 여군에 대한 젠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군대는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폐쇄적인 조직이었다. 당시 전쟁인력위원회(The War Manpower Commission)가 해군이 해상에 주둔하고 있고 해안에서 이들을 지원할 인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하면서 여성병력충원의 필요성에 대해 요구했을 때 의회와 해군 지도자들은 해군에 여성이 입대하는 것을 반대했다. 2017년 웨이브 부대 탄생 75주년 기념하는 자리에서 여성자문위원회의 한 일원은 “만약 해군이 개나 오리나 원숭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나이 든 해군 장성들은 아마도 여성보다는 그것들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이 인터뷰는 당시의 미국 주류사회가 가진 여성 군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후 제도적으로 여성 군인에게 남성과 동등한 조건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군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남성 수병들은 여성 해군이 자신들을 육지에서 바다로 몰아낸다는 생각에 적대적이었고 민간인들조차도 여성 군인들을 전시에 급조된 이례적인 군인으로 인식해 그들이 단지 유니폼을 입기 위해 입대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산이 해군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인터뷰에서 미국이 아버지의 나라를 식민 지배하고 있는 일본과 전쟁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해군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당시 안수산이 여성 군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는 당시의 미국 사회의 젠더 인식에 비해 좀 더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여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비단 미국 주류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안수산이 미국 해군에 자원입대를 결정할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 역시 여성이 군대에 입대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의 전기와 인터뷰에 따르면 해군에 지원할 당시 안수산은 어머니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해군에 지원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군에 지원하고 나서 어머니에게 알렸다. 그는, 군인은 여자가 하기에 적절한 일이 아니며 특히 한국 여성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반대할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 외의 다른 한인들도 “어떻게 딸을 해군에 보낼 수 있단 말이오? 도산의 딸을 말이오! 도산이 살아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군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표현했다. 안수산은 아마 도산의 딸이었기 때문에 해군이 되는 것에 대해 한인들로부터 더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 같다.

한인 2세대인 안수산에게 있어서 가족 같은 한인 공동체 내에서의 전통적인 젠더 규범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한인 공동체의 개척자이자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의 딸이었기 때문에 한국적 전통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수산은 한국적 전통이나 당시의 젠더적 통념과 관계없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안수산이 당시 한인 공동체 내에 만연했던 젠더적 편견을 극복하는 모습은 당당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히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처음 그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 역시 해군 입대를 결정한 안수산을 믿고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수산이 사회적인 젠더 규범에 대해 자유로운 인물이라는 것은 그가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 재학 시절 이미 첫 번째 아시안 아메리칸 여자 야구 선수로 획기적인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미국 해군 내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포격술 장교가 됐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안수산은 포격술 장교 시험에서 웨이브 대원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안수산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시험은 5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 사격이었다. 이 총은 거대하고도 기묘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 두려움 만큼이나 그는 이 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강철 덩어리를 잘 통제해냈다. 교관과 그의 동료들은 100파운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가 5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안수산은 이 기관총을 다루는 일은 힘의 문제라기보다는 균형성과 민첩성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안수산은 제도적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면 자신이 목표한 어떤 것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넘지 못할 벽은 있었다. 그가 마음속 깊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제로스를 격추시킬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안수산은 늘 자신이 진짜 비행을 할 수 있는 때가 언제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자신에게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 있는 남자 조종사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여자를 바다로 내보내는 것은 해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수산의 아들 커디씨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어머니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안수산은 놀라운 집중력과 강인한 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었다. 하지만 결국 당시의 제도적 규정은 그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수산이 가졌던 ‘남자들만큼’ 또는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당시 사회의 보편적 젠더 규범에 반대하는 그의 도전적인 성향만큼은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안수산은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보편적 젠더 인식과 관계없이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러한 그도 사회적인 인식에 대해 전혀 자유롭지는 않았다. 전기의 내용에 따르면 안수산이 장교가 된 이후 받게 된 주변의 관심과 기대는 그에게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계급장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이며, 더구나 황금빛 계급장은 미 해군에서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때로 계급장은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안수산은 늘 어떤 것에서 최초가 된다는 것은 축복과 저주라는 대가를 동시에 치러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실패하기를 바라고 여성군인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은 그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시대에 사회적 통념에 맞서는 그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안수산의 삶의 이력의 특별함은 비단 그가 차별받는 소수인종 여성으로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 사회와 한인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젠더적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주체성, 그리고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간 그의 용기야말로 우리가 인물 안수산의 삶의 이력을 좀 더 특별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글=박현순·사진제공=필립 커디(안수산 여사의 아들)


 
미 해군 소위 시절 안수산 여사의 모습.


 
박현순씨(경상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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