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9)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9)
  • 임명진
  • 승인 2018.10.19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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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들의 애향심이 일궈낸 위대한 승리”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 진주성 촉석루 전경. 남강 아래쪽엔 의암바위가 보인다.



진주성 1차 전투는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 가운데 대표적인 승리로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에 꼽힌다.

특히 개전 이후 연일 패퇴만 거듭하던 조선육군이 대규모 육상 전투에서 처음으로 이긴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의병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진주성 1, 2차 전투의 결과가 극명하게 엇갈려 진주대첩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늘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진주성 전투의 의미 등을 되짚어보고 향후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 지에 대해 지역 각계각층의 의견들을 들어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투 패배에 큰 충격”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위원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진주성 1차 전투가 대첩의 반열에 오르게 된 까닭은 그만큼 당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차 전투는 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당시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이 육상에서 거둔 첫 대승으로 전쟁의 양상을 유리하게 역전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됐다”고 평가했다.

역으로 1차 전투의 패배는 당시 일본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신 위원은 “당시 육상에서는 패배를 몰랐던 일본군이 대규모 전투에서 첫 패배를 당해 그 충격은 매우 컸다”면서 “도요토미도 수차례 진주성을 언급하면서 2차 전투 계획을 직접 수립했다”고 말했다.

승리 배경으로는 김시민 장군의 지도력과 의병들의 활약, 진주사람들의 애향심이 합친 위대한 승리라고 분석했다.

신 위원은 “1, 2차 진주성 전투는 불리한 전쟁의 판도를 바꾼 세기의 전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패배로 끝난 2차 전투를 거론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과론적으로 우리의 승리로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전투에서 비록 진주성이 함락됐지만 당시 조선에 주둔한 전 병력을 끌고 온 일본군도 9일간 엄청난 타격을 입고 결국 철수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신 위원은 “진주성 대첩과 관련해 남강, 논개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주지역에서 진주성 전투에 대한 교육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랑스런 도시 역사, 제대로 알려야”
정진용 진주대첩연구회장

“어린 학생들이 진주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정진용(진주 갈전초 교장) 진주대첩연구회장은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주지역에는 지난 2011년부터 일부 초등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진주성의 역사를 알리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진주대첩의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자발적인 활동이다.

정 회장은 “우리 지역의 역사가 과소평가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랑스러운 진주의 역사를 어린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 나가는 참여 교사들의 열정과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진주대첩연구회는 진주성에서 지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현장체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30~40명의 교사들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주말마다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하루에 3시간씩 진주성 투어를 하며 학생들에게 진주성과 그 처절했던 전투를 가르치고 있다.

이 교육을 거쳐 간 학생들의 수는 벌써 1000여 명을 훌쩍 넘고 있다. 모두 자발적으로 교육 참가를 신청한 학생들이다.

정 회장은 “1차와 2차 전투의 결과가 너무 달라 얼핏 생각하기에는 아픈 역사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진주성 대첩의 의미를 보면 분명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임에 분명하다”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를 정확히 알리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진주대첩 재평가 필요해”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

“진주대첩의 평가가 다소 소홀히 다뤄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진주대첩의 의미에 대해 “진주가 서부경남을 지켜냈고, 일본의 서진을 막아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고 말했다.

역사진주시민모임이 결성된 건 지난 2016년 5월의 일이다. 그동안 4차례의 토론회와 10여 회의 강연회를 열어 진주 역사와 문화를 가꾸는 일에 힘써 왔다.

최근 진주대첩광장의 조성과 외성 발굴과 관련해서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신중한 접근을 주문하고 있다.

조 공동대표는 역사진주시민모임의 사람들에게 진주성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말했다.

진주의 상징인 진주성의 가능한 부분을 복원해 진주가 역사 문화의 도시라는 것을 널리 알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주성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지만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에 가려져 진주대첩은 그 역사적 의미와 평가가 다소 소홀히 취급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진주의 역사에서 진주농민항쟁과 형평운동 등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이 다수 있다”면서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도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제는 우리 지역민들의 의사를 모아 진주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에 대해 지역사회에서 서로 합심해 좋은 방안을 도출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리=임명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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