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플러스 <208>거창 박유산
명산 플러스 <208>거창 박유산
  • 최창민
  • 승인 2018.11.1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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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내 소류지 부근에서 바라본 박유산. 산 실루엣 아래로 단풍이 들어가고 있는 수목이 아름답다. 
“박우산에 간따꼬? 우째, 거 먼디까지 갈라꼬 그라요, 이짝으로 갔다가 저짝으로 쭈-욱 올라가면 거가 박우산이라오”

박유산 들머리 동례마을 골목길을 뒷짐 지고 내려오던 할머니는 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 취재팀에게 발치에 있는 논두렁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박유산이란 이름은 고려 태조 때 인물 박유 처사에서 왔다. 그는 수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바뀐 세상에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다면서 이 산에 들어와 살았다. 할머니는 그런 박유산을 그냥 ‘박우산’이라고 했다.

거창군 남하면에 있는 해발 712m의 산으로 가조들 주변에 에둘러 있는 10여개의 산 중 가장 낮다. 말발굽처럼 중앙이 굴처럼 파져 있어 거지굴산, 혹은 불의 산이라고 해서 화룡산(火龍山)이라고도 한다. 낮은 산임에도 불의 산, 박유산 등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사연이 많기 때문이리라.

이산에서 보면 가조들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부터 금귀봉, 보해산, 장군봉, 지남산, 우두산(의상봉),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 미녀봉, 숙성산 등 800∼1000m가 넘는 산이 환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지형이 화산 분화구와 같은 백두산 천지를 닮았다. 들판 한가운데 백두산 온천 등 온천이 발달한 이유도 분화구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신비감을 준다. 거창군사에 나오는 박유산의 다른 이름 화룡산 이 ‘불산’이라는 것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이 산에 박유만 은둔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 고은 이지활(李智活 1434~?)과 고려 말 판도판서 전충수도 살았다한다.



 
명산_거창박유산

9시 10분, 산행 들머리는 거창군 가조면 동례마을이다. 40여가구가 넘는 마을로 가조면을 제외하고는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경로당에 주차한 뒤 물길 옆으로 난 마을 골목길을 관통해 올라간다. 그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박유산에 가겠다는 취재팀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길을 대강 가르쳐 주었다.

5분 상간에 광주대구고속도로 아래 굴다리와 기존 88고속도로 굴다리 2개를 잇따라 통과한다. 버리내소류지 옆을 따라 올라가면 곧장 산으로 붙는다. 이 소류지에서 정면을 보면 박유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산의 검은 실루엣 아래로 토종소나무와 참나무 서나무가 산허리를 감싸고 돌고 더 아래로는 단풍이 들고 있는 버드나무를 비롯한 유실수, 관목 등이 배경이 돼주고 있다.

 
gn20181110거창박유산 (96)
gn20181110거창박유산 (101)
뒤돌아보면 보해산, 장군봉, 의상봉 등 가조의 산들이 안개 속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암벽이 안개를 뚫고 올라온 모습인데 생경한 풍경이었다.

등산로 옆 입간판에 새긴 박유산 유래는 글씨를 읽어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아있었다. 없다면 모르겠으나 이왕 세운 거라면 당국에서도 새롭게 설치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간판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박유 처사가 정권이 바뀐 뒤 불사이군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았으며 이러한 정신을 잇기 위해 이지활과 전충수도 같은 길을 걸었다. 단지 ‘둔세소(遁世所) 망북암 표지석까지 약 2km’, 라는 글귀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둔세(遁世), 은거(隱居), 은둔(隱遁)의 의미인 둔세소인 듯 한데, 망북암은 암자를 말하는지 바위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경운기가 오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좁아진다. 주변에는 가시덤불이 많아지고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무덤을 볼 수 있다. 길지, 혹은 명당이어서인지 몰라도 묘비를 앞세운 산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등산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은 더 좁아지고 험해진다. 거기다가 희미하기까지 해 동행인의 투덜거림을 들어야했다. 가을 센가시가 얼굴을 할퀴고 드센 칡넝쿨이 발목을 붙잡는다. 덤불 속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길도 나타난다. 간신히 벗어났는가 싶으면 또 다른 넝쿨이 앞을 가로막는다.

10시 15분, 능선에 닿을 무렵, 솟구친 암벽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 산허리를 돌았다가 다시 치오른다. 산 아래 초록소나무와 황풍이 든 낙엽송이 찬란한 햇빛을 받아 강한 색대비를 이룬다. 한적한 시골동네 이발소 한복판에 걸려 있는 11월의 달력그림과 흡사하다.

능선에 올라선다. 수도산 양각사 보해산에서 금귀봉 박유산으로 연결되는 양각지맥이다. 이때부터 경사가 가팔라진다. 아담한 크기의 소나무 사이 허리를 굽혀 갈지(之)자로 걸어 올라간다. 소나무가 떨군 갈빗대가 풍운에 씻겨서 정갈하다. 그 옆 안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박유산 정상, 움푹하게 파여 있는 모양새가 예비군 훈련장 방호용 초소를 닮았다. 정상석은 없고 입간판엔 ‘거창 5경’이라며 박유산의 유래를 적어놓았다. 이지활은 박유를 흠모했던 모양이다. 한양 출신으로 14세때 사마시에 합격한 뒤 18세에 문명으로 추천돼 운봉현 감무(監務)에 제수됐다. 1455년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벼슬을 떠나 이 산에 은거했다. 그는 박유를 제사하는 제문을 지어 조문했다. 단종에겐 망월정시를 지어 절의를 표했다. 또한 산속 망월정(望月亭)에 앉아 달이 뜨면 단종을 생각하며 북향재배했다한다. 함양군 병곡면 송호서원에 손자 이지번과 같이 배향됐다. 그의 호를 딴 고은집(孤隱集)4권 1책이 전한다. 이 외 고려 말 판도판서 전충수도 이곳에 은둔했다.

조선 중기 학자 팔송 정필달이 이곳에서 시를 남겼다/높은 선비가 높은 산과 더불어 있으니 어느 것이 높은지 분간키 어렵구나/산 이름이 선비로 인해 전하니 아마도 선비는 산보다 높을 것이다/

정상을 벗어나 낙엽이 지천인 경사로를 따라 내려선다. 급경사에다 참나무 낙엽이 겹으로 쌓여 미끄럽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덤불속을 헤쳐야하는 박유산 등산길
평지마을 소나무
11시 10분, 달분재에 닿는다. 해발 470m 양옆으로 시멘트 임도가 연결돼 있다. 오른쪽은 남하면 지산리로 간다.

달분(達分)은 불교용어로 수행이 더욱 통달했음을 의미한다. 옛날 주변에 절과 암자가 많아 스님들이 많이 오갔다는데서 유래한 또 다른 달분재는 의령 자굴산에 있다.

왼쪽 길을 택해 안금마을로 향한다. 박유산 동쪽 기슭에 있는 이 마을은 지형이 거문고를 닮아서 안금(安琴)이라고 했다. 길 위에 고목이 늘어져 있는 풍경이 이채로운 마을이다. 무신난 때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은 금호 오세창의 흔적이 이 마을에 남아있다. 고종 27년 후손들이 마을 한가운데 공을 기려 금호재를 세웠다. 지금도 금호재에선 매년 춘추향례를 치른다.

다시 광주대구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해 평지마을을 거쳐 동례마을로 회귀한다. 평지마을 어귀 언덕에는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 두그루가 금슬좋은 부부처럼 살고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gn20181110거창박유산 (72)

 
주인이 탄 차를 따라가는 삽살이
맞은 편 비계산 풍경
평지마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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