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81>태극종주길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81>태극종주길
  • 경남일보
  • 승인 2018.10.2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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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월재 돌탑 앞에서 사진 촬영을 기다리는 탐방객들.


진달래꽃이 봄산의 주인공이라면 가을산의 주인공은 단연 억새꽃이다. 진달래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풍이 들기 전의 틈새를 노려 소박한 꽃빛으로도 가을산을 지배해 버리는 존재가 억새다.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떼로 뭉쳐 바람에 맞서 은빛 꽃술을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기에 충분한 꽃이 억새꽃이다. 그런데 억새꽃은 왜 산등성이에만 떼를 지어 피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는 등성이에서 은빛 꽃술의 자태와 쓰러지지 않는 자신의 강인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억새는 발품을 판 사람한테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건네준다. 억새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GP클럽 산악회(회장 서향덕) 회원들과 함께 간월재 억새 군락지를 찾았다.

영남알프스는 경남 밀양시 산내면, 청도군 운문면, 울주군 상북면에 자리 잡은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신불산, 영축산, 간월산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능선을 이은 산행코스가 태극(S)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남알프스 태극종주길이라고 한다. 이번에 떠난 하늘억새길은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배내고개에 출발해서 장군평삼거리-배내봉-천질바위전망대-선짐재-간월산-간월재-임도-홍류폭포-등억온천단지로 이어지는 5시간 정도 걸리는 힐링산행길이다.

배내고개에서 시작한 산행은 처음부터 가파른 나무 계단길을 치고 올라가야 했다. 한참 올라가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건너편에 우뚝 솟은 재약산과 천황산, 그리고 가지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나무계단길이 마치 천국으로 올라오는 계단처럼 가파르게 펼쳐져 있다. 25분 정도 쉬지 않고 올라가자 장군평 삼거리에 닿았다. 이때부터는 가파른 길은 없었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해서 이어지는 배내봉과 천질바위 전망대, 간월산까지 능선을 타고 걸었다. 능선 오른쪽에는 준봉들이 거느린 배내골 골짜기들이 켜켜이 겹쳐 있고 왼쪽으론 언양과 울산이 산과 산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배내골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들에는 애틋한 전설 하나쯤은 머금고 있을 법했다.

 
▲ 간월재 휴게소와 간월산 모습.


은빛 물결 출렁이는 간월재 억새밭

배내골을 배경 삼아 쓴 작가 오영수의 은냇골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이 떠오른다. ‘약초 캐는 형제가 어느 날 은냇골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벼랑까지 왔다가 골짜기에 삼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칡으로 바구니를 얽고 밧줄을 맨 다음, 몸집이 작은 아우가 줄을 타고 내려갔다. 삼을 본 아우는 욕심을 내어 많은 양의 삶을 캔 뒤 줄을 타고 벼랑을 올라올 때 별안간 바위틈에서 가마솥만한 거미가 나와 이 밧줄을 끊어 버렸다. 결국 형제는 안개 속에 싸여 묻혀 버렸다’는 얘기로 깊은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함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후손마저 끊기는 애절한 내용의 전설이다. 옛날에는 오지로서 고단한 삶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배내골이 지금은 관광과 힐링의 공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충전시켜 주는 곳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거느린 능선길 양켠에는 용담, 구절초, 쑥부쟁이꽃 등 가을꽃들이 맑고 선명한 빛으로 피어 산길을 밝히고, 오이풀 열매와 누리장나무 열매도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탐방객들에게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질바위전망대와 선짐재, 간월산을 지나자, 마침내 간월재가 나타났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간월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파래소폭포에서 간월재로 온 적은 두어 번 있었지만 배내고개에서 간월재로 트레킹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한 뒤 도착한 간월재라서 그런지 은빛 물결 출렁이는 억새밭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900m 간월재 산등성이에 부는 바람과 오후 3시의 가을 햇살이 만나서 그려낸 억새밭은 한 폭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와 담백한 은백색 꽃도 탐방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겠지만, 탐방객들로 하여금 사색과 몽상에 젖어들게 하고 우수(憂愁)에 빠지게 하는 억새꽃의 매력이 수많은 탐방객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새꽃 핀 가을산을 찾은 탐방객들의 밝은 표정에서 요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면적 깊이가 담긴 행복감을 읽을 수 있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온 자신을 잠깐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걱대는 억새처럼 스스로의 삶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억새가 사람들에게 건네는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억새는 바람이 떠미는 방향으로 쓰러지는 걸 한사코 거부한다. 잠깐 바람이 멎으면 곧 바로 몸을 곧추세운다. 절묘하게도 민초들의 삶과 닮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새를 즐겨 찾는지도 모른다. 억새밭 사이로 난 데크길엔 탐방객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간월재 돌탑 앞에서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주, 이곳에서 억새 축제인 산상 음악회 ‘울주 오디세이’가 열렸을 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간월재 억새군락지 풍경.

가을색으로 물든 열두 굽이 임도

등억온천지구까지는 임도로 내려왔다. 포장된 길이라 다소 아쉬웠지만 열 두 굽잇길이 걷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내려오는 길 왼쪽엔 간월공룡능선, 오른쪽엔 신불공룡능선이 탐방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임도변 활엽수들이 점점 가을색으로 짙어가고 있었다.

등억온천단지에 있는 영남알프스 클라이밍센터에서는 수직 암벽을 타고 오르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행복해 하는 모습들이다. 그래, 오른다는 것은 즐거운 내리막을 맞이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긴 오르막이 있었기에 가을로 익어가는 간월재 억새밭과 단풍드는 내리막 임도를 만날 수 있었다. 억새하늘길, 하늘을 행해 난 길이 아니라 지상을 향해 나 있는 길임을 산을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가을빛이 짙어가는 간월재 임도.

장군평에서 바라본 천황산과 재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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