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잎 지는 무렵에
단풍나무 잎 지는 무렵에
  • 경남일보
  • 승인 2018.11.25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산책 코스에 이십 년생쯤 될 단풍나무 두 그루가 있다. 바투 붙어 가지가 엉킨 이 나무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단풍철에 빨간 잎 노란 잎이 뒤섞여 마치 한 뿌리에서 두 색깔이 핀 것처럼 묘해 그걸 즐기는 것이다.

햇살 받을 때 단풍잎은 씻은 듯이 맑다. 하도 깨끗해 2000 가지 넘는 색상을 담았다는 팬톤컬러차트에선들 저 색 찾을 수 있으랴 싶다. 여기에다 ‘샛노랗다’느니 ‘새빨갛다’고만 표현하는 건 부족하다. 아무래도 필설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할 듯하다.

이달 초 물들기 시작해 지지난 주 절정을 이룬 단풍잎은 ‘서리 맞은 잎이 이월 꽃보다 붉다’는 옛 시구 그대로였다. 한데 요 며칠 새 속절없다 싶더니, 주말께 날씨가 추워지자 순식간에 다 졌다. 가지에 붙어 있는 것들도 이미 윤기 없이 뒤틀린 고엽(枯葉)일 뿐이다.

휘익, 한 줄기 솔바람이 스치자 낙엽이 우수수 진다. 절정을 구가한 기간이 고작 열흘 남짓이라니, 단풍잎의 일생이 짧다. 봄이 어찌 여름만큼 길며 가을이 어찌 고난의 겨울보다 길겠는가마는 잠깐 반짝하고 시드는 게 아쉽다. 하지만 그게 엄연한 자연(Nature)이다.

단풍잎이 물드는 걸 식물학에선 타감(他感) 작용의 한 형태로 본다. 식물이 어떤 화학물질을 생성하여 다른 식물의 생존과 성장을 저해하는 일이 타감 작용이다. 저 단풍나무 잎에는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안토시아닌이란 독소가 있어 주변에 다른 나무 씨앗의 발아를 막는다는 거다. 예쁜 단풍잎이 품고 있는 이 잔인한 생존전략 또한 자연 아니랴!

타감 작용의 대표적 수종이 단풍나무지만 예를 더 들자면 양미역취도 있다. 이 잡초는 타감 작용이 아주 강하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주변의 다른 식물을 머잖은 장래에 몰아내버리고 집단군락을 이룬다. 강한 독소 덕분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거다.

하지만 군락의 양미역취들은 얼마 안 있어 왜소해지고 세력도 약해진다고 한다. 공격 상대를 잃은 독소가 결국 동족들을 해친다는 거다. 놀라운 반전이요 자연 현상이다. 흥망성쇠는 돌고 돈다는 노자의 말, 물극필반 세강필약(物極必反 勢强必弱)이 곧 이건가.

낙엽 지는 계절에 단풍나무 아래 앉아 식물의 타감 작용을 생각하게 된 건 왜일까. 인간 세상에도 비슷한 생태가 있지 않으냐는 상념에 젖은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후련히 궤멸시키고 나면 그 통쾌한 승리는 영원할 것인가, 얼마 못가 승자의 무리 역시 잡초처럼 스스로를 해치게 될 것인가, 뭐 그런저런 잡념에 빠져들어 보는 것이다.
 
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