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4>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4>
  • 경남일보
  • 승인 2018.11.2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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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다
안수산 여사가 지난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UCLA에서 오바마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당시 안수산은 “오바마 후보에게서 아버지 ‘도산’의 정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안수산은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었고 아시안이면서 소수민족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가 겪은 중첩된 억압의 요소 중 인종적 차별은 그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그를 강하게 단련시킨 요인이었다. 안수산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뿐만이 아니라 20세기 초·중반 내내 유색 인종인 아시안들에게 가혹하고 차별적인 곳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안수산의 삶의 이력 곳곳에는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았을, 인종차별을 극복한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016년 5월 TIME지는 안수산을 UNSUNG WOMEN(미국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여성 영웅)으로 선정했다. 당시 TIME지가 보도한 타이틀은 “The Officer Who Opened the U.S. Navy for Asian-American Women(아시안 아메리칸 여성들에게 미국 해군의 문을 열었던 장교)”였다. 보도 내용의 주요 골자는, 때로 가혹하고 차별적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수산이 코리안 아메리칸 해군 장교라는 선구자적인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TIME지가 유독 강조하는 내용이 ‘아시안 여성 최초의 해군 장교가 된 안수산’인 이유는 당시의 미국 해군이 유색 인종 여성들에게 특히 폐쇄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안수산이 해군이 되기 위해 지원했던 ‘웨이브’라는 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7월 30일에 창설됐다. 당시 웨이브 부대는 도시 및 농촌 지역에서 모집한 2만 명 이상의 장교와 7만 명의 사병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고 특히 웨이브의 30% 이상이 해군 비행 훈련 교관, 항공 교통 관제사, 낙하산 조종사로 일했다. 그러나 웨이브 내에서 유색 여성들의 비율은 전체 여성 예비군 비율의 1% 미만을 차지했다. 전체 9만 명의 웨이브 병력 중 유색 인종은 고작 2명의 장교와 70명의 사병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이러한 사실만을 보더라도 당시 아시안이었던 안수산이 웨이브에 입대한 사실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큰 장벽에 맞서 이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안수산이 처음 해군에 지원한 곳은 장교 훈련학교였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사병으로 지원했다. 안수산의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과 맞닥뜨렸을 때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 시련을 극복하는 그의 삶의 한 방법이었다. 2009년 안수산은 그의 95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차별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군에서 장교훈련을 거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것도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훈련거부는 단지 인생의 한 사건에 불과하였다. 나는 인종차별에 관한 한, 그것은 스스로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수산은 해군에서의 장교훈련학교 지원을 거부당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가능한 길을 모색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인터뷰 답변처럼 안수산은 인종차별에 관한 한 그것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묵묵히 살아나갔다.

 

안수산 여사가 2003년 3월 24일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한 후 캘리포니아 주 정부 의회 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의회는 웨이브 부대의 전쟁 중 공적을 높이 평가해 평화적인 시기에도 여성들에게 군에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로 합의하고 1948년 7월 28일에 ‘여성 군사력 통합법’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에 트루먼 대통령은 인종, 신조,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미국 군인들에게 평등한 대우를 선언했다. 미국 사회는 웨이브의 여군들이 징집이 아닌, 자원한 군인들로서 군 여성의 지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는 사실과 제복을 입은 여성들에게 주어진 미신과 고정 관념을 떨쳐 버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웨이브의 공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후 현재까지 웨이브는 이전의 전쟁, 갈등, 위기에서 국가를 지원했던 여성들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들 이후의 여군들을 위한 길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안수산이 복무하던 당시에는 법적으로 인종차별을 철폐한 ‘여성 군사력 통합법’ 적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군 복무 당시 만연했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해군이 된 이후 안수산은 애틀랜타에 있는 링크 모의 비행 훈련학교에 배정됐다. 그곳에서도 역시 그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안수산은 미국 사회가 가진 차별과 편견에 대해 자신만의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극복했다. 안수산의 전기에 따르면 웨이브 부대가 모의 비행 훈련학교로 이동한 이후 많은 백인 병사들은 안수산을 무례하게 노려보거나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거나 귀엣말로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수산은 애써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지내기로 했다. 그는 문제가 있는 쪽은 수산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좁은 식견을 가진 그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해군에 지원하던 순간부터 해군 생활을 하는 내내 안수산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으나 그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절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의 이런 긍정적 사고는 그가 속한 조직 내에 만연했던 인종적 차별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안수산은 타계하기 불과 하루 전인 2015년 6월 23일 공식 강연에서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너희는 성공을 위해 다만 최선을 다하라.” 이 짧은 한마디는 안수산이 인종차별에 맞서 살아온 그의 삶의 방식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안수산이 인종적 편견을 극복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멋졌던 것은 그의 결혼이었다. 1947년 4월 25일 안수산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커디(Frank Cuddy)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결혼은 미국 사회의 일반적 관행까지 앞서 나가는 것이었다. 미국은 17세기부터 순수 백인 혈통의 유지를 위해 ‘인종 간 결혼 금지법’을 시행해 오고 있었고 20세기 당시에도 대부분의 주에서 그 법은 여전히 유효했다.(인종 간 결혼 금지법은 1967년에 폐지되었다) 당시 그가 살았던 버지니아 주 또한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종 간 결혼을 허용하였던 워싱턴 D.C.의 해군 통신본부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혼이 같은 인종 간의 결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1950년 딸 크리스틴과 프랭크 그리고 안수산 여사의 모습. 이혜련 여사는 안수산의 결혼에 반대해 5년 동안 안수산을 찾지 않았으나 손녀 크리스틴의 재롱을 보고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그들의 결혼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안수산 측에서는 알링턴 홀의 몇몇 사람이, 프랭크 측에서는 몇몇 해군 동료들과 프랭크의 가족만이 알고 있었다. 해군 예배당에서 이루어진 이 소박한 결혼식에 안수산의 가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프랭크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머니가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해군에 입대할 때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결혼도 비밀로 했었다. 결혼에 있어 인종차별적인 법보다 더 큰 난관은 한국의 전통과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반대 역시 안수산의 결심을 막지는 못했다. 안수산의 어머니 이혜련 여사는 그 후 5년 동안 그에게 집에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5년이 지난 이후에야 안수산의 딸 크리스틴의 재롱으로 인해 마침내 회복될 수 있었다.

안수산은 결혼에 대해 한국적 전통이나 관습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 결혼이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프랭크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고, 프랭크에게도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안수산은 관습과 전통을 과감히 뿌리치고 사랑을 선택했고 평생을 해로했다. 안수산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인종적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인물 안수산의 삶은 인종차별을 극복한 삶이었다. 그가 코리안 아메리칸 2세대들에게 강조한 것 역시 차별과 편견에 대한 극복이었다. 차별과 편견에 대한 극복은 사회 변혁 운동 이전의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인종이 사회적 주류가 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실천적으로 개척해 간 여성 인물은 많지 않았다. 안수산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인종차별적인 법이 존재하고 있었던 국가 미국에서 차별을 극복함으로써 미국의 역사가 진보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인물이다. 우리가 인물 안수산을 그의 삶 자체로 기억해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글=박현순·사진=필립 커디(안수산 여사의 아들)









 
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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