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퇴계를 찾은 까닭은
율곡이 퇴계를 찾은 까닭은
  • 경남일보
  • 승인 2018.12.0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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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권((전)합천부군수 ·행정학박사)
박창권

도산서원에서 오 리 남짓한 거리에 퇴계종택이 있고, 인접하여 계상서당이 있다. 이곳은 퇴계가 50대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거처로 정하고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도리를 탐구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이력으로 보아 집 이름자에 재(齋)나 장(莊)이나 루(樓)와 같이 위용을 품음직도 하건만 개울가에 있다고 해서 계상서당이다. 선생의 호도 개울가로 물러났다고 해서 퇴계라 하였다. 바로 이곳에 23세의 청년 율곡이 퇴계를 찾았다.

율곡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까.

두 지성의 만남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추된다. 16세기 조선은 국가 기틀을 잡아가면서 경제와 산업이 발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치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반이 허술했다.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훈구 척신들은 백성의 복리증진보다는 양반의 착취구조와 엄정한 신분질서를 고착화시켜 나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에 대한 반성과 반발로 사림이 등장했다. 경제변동으로 동요하는 사회질서를 유교적인 윤리체계로 갱신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이 꿈꾼 세상은 국가 권력이 인간 본성에 충실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성리학적 기반에 의해 그 원리가 작동되는 국가가 그것이다. 유교원리에 의한 민본정치를 제대로 실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정치행정사상은 위정자의 수기치인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다. 퇴계는 경(敬)을 통한 자기수련을 강조하고 율곡은 인(仁)에 기초한 대동사회 건설을 경세의 이상으로 삼았다. 스스로 완전한 인격체를 궁구하여 실행하는 가운데, 퇴계는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율곡은 인간이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율곡은 퇴계에게 평생 가슴에 담을 잠언을 요청하였다. 사양하던 퇴계가 전한 말씀은 장차 조정에서 너무 많은 일을 벌이지 말라는 것과 나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구도장원공으로 칭송받던 율곡은 세상을 경영할 묘책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도를 듣고자하는 율곡에게 퇴계는 작은 먼지도 반짝이는 거울을 방해하니 서로 노력공부하자고 응답한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삶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퇴계와 율곡이 고민했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제가 되고 있다.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경제와 문화 전반의 변화를 정치 제도적으로 이를 조정 융합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복잡다기한 변수들이 사회변동에 상호작용하는 만큼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긴요하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위정자는 사회를 말하기 전에 자신을 정립하는 수기(修己)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박창권((전)합천부군수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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