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승달
겨울 초승달
  • 경남일보
  • 승인 2018.12.0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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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이 시의 제목은 ‘동천(冬天)’. 한국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의 1966년 작품이다. 흔히 그의 60여년 문학 생애를 6기로 나누거니와, 이 짧은 시는 그 한 획을 긋는 명작으로 꼽힌다.

달리 뜻을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동지섣달의 초하루부터 며칠간에 뜨는 초승달을 노래한 거다. -겨울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들 무렵 노을 진 서녘 하늘가에 눈썹달이 걸린다. 하늘이 맑으니 달은 더 말끔하다. 그 곁을 동무 잃은 겨울새 한 마리 외로이 날고 있다-. 수정처럼 차가운 엄동의 초저녁 하늘 묘사다. 해 갓 진 겨울 하늘을 이만큼 짧고 선명하게 그려놓은 글이나 그림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밤하늘의 달 보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달 중에도 박명의 하얀 초승달이 좋고, 총중에도 동짓달의 그것을 제일 아낀다. 어둑한 하늘의 실 가닥 같은 초승달은 살아나는 달이 아닌가. 차가운 겨울 손톱달에서 잿불처럼 숨은 생명력을 보는 것이다.

열아홉 무렵에 시 ‘동천’을 배웠다. 그 후 오십 년 가까이 거의 예외 없이 해마다 동지섣달이면 초승달을 보려고 해왔다. 올해도 그랬다. 엊그제 초하루엔 구름 땜에 놓쳤지만 다음날은 다섯 시 반쯤에 잠깐 포착했다. 마치 샤프연필로 그은 괄호 같았고 새의 한쪽 날갯짓과도 같았다. 무리를 놓친 철새의 외로운 비상만 없었을 뿐 그 풍경은 가히 ‘동천’ 시의 실경이라 할 만했다.

나는 작년 동짓달 초승에도 이 글과 비슷한 메시지를 지인에게 띄웠다. 연말의 허허로운 심사와 일월(日月)에 실려가는 생의 무상감을 초승달에 의지해 풀었던 거다. 한데 올해 보니 해가 떴다가 지고 달이 도는 건 하늘이 호흡을 반복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상(無常)은 시간에 따라 모두 변한다는 것. 그래서 덧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음력 11월 초승달은 또다시 작년의 그 시각 그 모습 변치 않고 그 자리에 돌아왔다. 아, 일월은 무상한 게 아니다. 차고 이지러지는 건 생명의 호흡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한다. 어찌 광음(光陰)만 그렇겠는가.

생로병사로 꾸려지는 사람 일생을 무상하다고 탄식하지만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하는 게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영욕과 애락도 자손이 잇는다. 이럴진대 돌고 도는 일월과 무엇이 다르랴. 각설~. 스스로도 부박한 사유가 참으로 저기하지만 혼자 이런 유치한 생각에 젖어 동짓달 예쁜 신월을 또 한 번 즐긴 것이다.

 

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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