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5>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5>
  • 경남일보
  • 승인 2018.12.0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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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남긴 유산과 정체성<끝>
▲ 2015년 6월 23일 코리안 아메리칸 2세들을 위한 리더십 교육에서 마지막 강연을 한 뒤 찍은 사진. 안수산 여사는 다음날 돌아가셨다.


미국과 한국 모두를 사랑한 안수산
한인 2세들에게 마지막까지 당부한 말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리고
한국인의 유산을 절대 잊지 마라”




미국 사회에서 젠더적 편견과 인종적 차별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한 인물이라는 부분 외에 주목해 보아야 할 안수산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양 국가를 향해 표현되는 그의 정체성이다. 미국 한인 공동체 역사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안수산은 그가 태어난 나라 미국과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중첩된 애국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딸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적 인물로서의 안수산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안수산이 링크 모의비행 훈련학교를 졸업하는 날 미국의 언론들은 안수산을 주목했고 사람들은 푸른 해군 제복을 입은 동양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죽은 안창호의 딸이라는 배경은 미국 사회가 안수산을 더욱 주목하게 하는 이유였다. 1943년 3월 27일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지는 토요일 조간 1면에 “한국 영웅의 핏줄, 자랑스럽게 웨이브의 대원이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내용에는 안수산 자신이 “웨이브 대원이 된 것을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자신이 “웨이브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바친다”는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수산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미국 해군은 안수산의 출신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가 그것을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모임에서 연설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해군에서는 안수산에게 전속 사진사까지 배당해 주었고 사진사는 일할 때도 휴식 시간에도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미국 해군은 안수산이 여성 해군장관 후보학교에 지원했을 당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지만 안수산이 해군 장교가 된 후에는 동양인 여성 안수산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고 웨이브 대원으로서의 그가 공식적으로 드러나기를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다수 언론이 안수산의 배경에 주목하면서 보도한 내용은 그가 한국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사실과 한국의 적인 일본과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안수산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 미국 언론의 보도를 접할 때면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그의 정체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분명 미국 땅에서 나고 자란 미국 시민이었고 미국에 충성해야 하는 군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바라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워야 하는 한국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과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안수산이 가졌던 이중의 충성심에 대해 양국의 언론은 각기 자국의 여론 형성에 필요한 방향으로 보도를 했다. 미국 언론은 전쟁 당시 미국에 대한 소수민족의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고 한국과 미국 한인 공동체의 언론은 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한국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안수산의 이러한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정체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공동체가 지향하는 방향을 살펴봄으로써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20세기 초에 미국 땅으로 이민 온 중국과 일본 등 동양계 이민자들은 대부분 캘리포니아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미국 내 다른 지역보다 동양인 차별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연방정부가 전쟁의 주축국 출신의 이민자들은 적국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연합국인 중국계 이민자들은 우호 외국인으로 분류함으로써 동양인에 대한 차별 양상이 변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한인들은 적국 외국인으로 간주됐고 이에 대해 한인들은 반발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42년 1월 24일 미국 법무부는 한인이 더이상 적국 외국인으로 간주 되지 않을 것이며 외국인 등록 시 한인은 일본인이 아닌 한인으로 등록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의 한인들은 한인이자 우호 외국인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됐다. 당시 한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는 나라 미국과 빼앗긴 고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에 대항함으로써 차별받는 동양인의 위치에서 인정받는 미국 시민의 위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당시 미국 한인 공동체의 애국심은 미국과 빼앗긴 조국에 대한 이중적 애국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안수산의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정체성 역시 이러한 당시 미국 한인 공동체 전반의 분위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산의 트랜스내셔널리즘적 정체성은 은퇴 이후의 그의 삶에서도 잘 나타난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안수산은 독립운동가의 딸로서 한국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1960년대 도산공원 건립계획이 진행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과 교류하기 시작해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했고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도산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기증했다. 이와 동시에 안수산은 한인 이민 개척자들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미국 한인 공동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그의 삶을 할애했다. 이러한 안수산의 모습에 대해 TIME지는 “안수산은 그가 사랑한 미국 한인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고 보도했다.

안수산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인터뷰에서 늘 자신이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오로지 젊은 코리안 아메리칸 2세대들의 교육에 몰두하면서 아버지 도산의 철학과 자신의 경험담을 전했고 그들이 미국 땅에서 참주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안수산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친 시기 동안 로스앤젤레스 교민사회에서 ‘미국 한인 이민사의 산증인’으로 불렸다. 그는 타계하기 하루 전인 2015년 6월 23일까지도 공식 석상에서 2세대들에게 마지막 강연을 함으로써 100세 고령의 행적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강인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마지막 강연에서도 그는 아버지 도산이 자식들에게 남겼던 말을 전했다.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리고 한국인의 유산을 절대 잊지 마라”

안수산이 한인 2세대들에게 전한 이 말은 그가 가진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이 곧 미국 내 한인 공동체 사회가 가져야 할 정체성임을 시사하고 있다.



안수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된 이후 그가 해군에서 한 단계식 성취해 가는 동안 무수한 언론의 조명을 받았고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종전 후 해군 정보관으로, 전역 후 국가안전보장국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할 당시에는 그가 소속된 부대의 ‘특급 비밀 유지’ 규정으로 인해 한동안 기자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은퇴한 이후 안수산은 한인 공동체에서의 활동과 다양한 수상을 통해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또한 2015년 6월 24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안수산이 살아있을 당시뿐만 아니라 사후까지도 지속적인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미국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미국 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안수산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먼저 안수산은 그가 이룬 삶의 성취를 통해 미국의 아시안 여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안수산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었지만 그의 삶이 가진 영향력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안수산이 차별받던 미국 내 소수인종 여성들의 삶에 미친 이러한 영향은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또한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었던 안수산이 아버지의 조국에 대해 가졌던 애국심이 미국의 한인 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남긴 또 다른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산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안수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생활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으나 안수산은 수많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나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운다는 표현을 했다. 그의 인터뷰로 인해 미국 사회는 식민지 한국과 조국을 찾고자 하는 한국인들을 인식하게 됐다. 안수산의 전기 작가 존 차는 “안수산의 생애는 우리의 인류의 역사에서 볼 때는 작은 물방울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의 역사에서는 뜻깊은 물방울이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 조국을 찾으려는 한국인들의 존재를 각인시킨 안수산의 삶은 그가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유산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에서 형성된 한인 공동체를 이끌고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아버지의 부재로 안수산과 가족들은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러한 환경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수산은 유대가 긴밀한 한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인물로 성장했고 삶의 매 순간순간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택과 노력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차별받는 아시안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 그가 이룬 많은 성취로 인해 안수산은 소수민족 공동체 역사의 주역이 됐다. 안수산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들은 젠더적이고 인종적이고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모습들이 중첩돼 있다. 젠더, 인종, 트랜스내셔널리즘 등의 관점에서 안수산을 재조명함으로써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산은 20세기 미국 사회에서 젠더적 편견과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인 동시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 미국과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중첩된 애국심을 가졌던 인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여성의 역사를 창조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연구한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에 관한 논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음을 본 기고를 하면서 다시 느끼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가 여성으로서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안수산의 역사를 심화시킬 수 있는 후속 연구를 위한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많은 여성사 연구의 자극제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 계속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글=박현순·사진=필립 커디(안수산 여사의 아들)









 
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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