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젖
동네 젖
  • 경남일보
  • 승인 2019.01.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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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전 언론인, 진주기억학교 센터장)
김상진
김상진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페이스 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모두 미국의 기부 왕들이다. 나는 이 사람들의 기부소식을 들을 때 마다 기부문화는 서양이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 시설로 등교하시는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다. 한평생 어려운 가정 꾸리며 자식을 길러 낸 이 땅의 어르신들이 기부 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가족을 넘어선 사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를 실천했다.

자신의 별명이 ‘동네 젖’ 이었다는 김 할머니.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빨치산의 총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친정아버지는 할머니를 장애인과 결혼시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라 몸이 성한 사람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간다기에 그 결정을 순순히 따랐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농사를 지었다. 쌀가마니를 들어 올려야 하는 고된 농사일의 연속이었다. 3남 1녀를 기르는 동안 젖이 잘 나왔다.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잘 먹었게 되고, 몸이 건강해져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앞집 원동 댁은 젖이 모자랐다. 아이가 마른 젖꼭지를 빨아대니 물집이 잡혀 있는 게 안쓰러워 젖을 주기 시작했다.

“퉁퉁 불은 젖가슴을 쑥 꺼내서 젖을 물리면 우는 아이가 잠드는 게 얼마나 좋든지…”

‘동냥젖’ 소문이 나면서 다른 아이는 물론 아이를 업은 봇짐장수들도 찾아왔다. 아침이면 그릇을 들고 젖을 얻으러 오는 집이 있을 정도였다.

“내 자식 남의 자식 어디 있능교. 다른 좋은 일은 못해도 젖은 많이 줬어.”

할머니 젖 먹고 자란 아이가 돌이 되면 할머니 저고리를 지어 온 게 몇 벌일 정도였다.

할머니가 농사를 지어 슬하의 3남1녀를 교사, 대기업체 사원 등으로 남부럽지 않게 길렀다. 도시의 자식들은 오라지만 짐이 될까봐 혼자 고향을 지킨다.

서양의 기부문화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상징된다. 높은 신분을 가진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다. ‘동네 젖’ 할머니에게서 보듯이 한국의 기부문화는 서민들이 소리 없이 실천하는 형태가 많았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나도 조용히 실천할 수 있는 기부를 고민해야겠다.

 
김상진(전 언론인, 진주기억학교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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