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방문화의 맛과 멋을 찾아서(3)
진주교방문화의 맛과 멋을 찾아서(3)
  • 경남일보
  • 승인 2019.01.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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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문화의 전승·보전은 시대적 요청
심포지엄 개최 등 학문적 접근 노력 필요
역사·문화 활용한 문화컨텐츠 개발 노력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의 논개 부조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의 논개 부조

교방문화를 선도한 기녀(妓女)는 신분제도에 있어 하층민에 속한 존재로 신분적 멸시와 냉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중 삼중의 억압과 천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그릇된 인식의 확산에 따라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해 온 교방문화가 이 땅에서 소멸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부족해 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적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교방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부당한 제도와 부적절한 사회적 시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방문화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교방문화의 전승과 보전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방(敎坊)의 역사와 기녀(妓女)

고려시대에 기녀(妓女)들에게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교방(敎坊)이 있었다. 교방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교육을 받은 기녀들은 궁중의례와 연회, 외교사절 접대, 연등회, 팔관회 등과 같은 국가행사에 동원됐다.

교방(敎坊)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기녀들의 교육을 관장했고, 조선 초기에 설치된 악학도감과 장악서 등을 계승한 장악원(掌樂院)이 설립된다. 장악원은 성종 1년(1470) 이후, 고종 광무 1년(1897)의 관제 개혁으로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 까지 427년 동안 활동한 국립 음악기관으로 자리했다.

조선 세조 때 장악원(掌樂院) 하부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합쳐 교방이라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지방에도 교방을 설치했다. 특히 지방에 설치된 교방의 위치는 읍성 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한 지방 관아(官衙)에 딸려 있는 건물로 대개 관문 밖 객사(客舍)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진주의 교방에 대한 기록은 진주의 인문지리지 ‘진양지(晋陽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우(館宇)’조에는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郎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坊)이 있었다(中大廳 東西各有郎廳房 西郎廳之前 有敎房)’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옛 진주MBC가 바로 진주객사가 있던 자리이며 진주교방이 있던 곳이다.

갑오개혁(1894년)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장악원이 해체되었다. 이에따라 궁중과 지방관아에 속한 기생안(妓生案)이 사라지면서 관기(官妓)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1905년에는 고려시대 당악정재·향악정재를 연주했던 교방악의 전통을 이은 여악(女樂)마저 폐지되면서 1909년 관기제도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생계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하나로 기생조합들이 생겨나게 된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4월 경찰 주도하에 만들어진 한성기생조합이며, 조선기녀의 전통과 역사가 반영된 다동기생조합과 광교기생조합도 잇달아 만들어 진다.

이때부터 이른바 ‘기생문화’가 이 땅에 자리잡게 된다. 당시 일제는 기생조합의 설립에 따른 기생활동을 통제하는 단속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기생은 관청에 속한 관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일패 기생과 은근자(隱勤者)라 불린 이패 기생, 탑앙모리(搭仰謨利)라 해서 몸을 파는 유녀인 삼패 기생으로 엄격히 구분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한 뒤 예기(藝妓)와 창기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속칭 ‘기생(妓生)’으로 불리게 되는 불행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던 기녀(妓女)들이 기생(妓生)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

특히 당시 기생조합들은 1914년부터 일제의 강요에 의해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권번제도가 도입되면서 예기와 창기의 구분이 없는 ‘가무와 몸을 파는 기생’이라는 이미지로 정착되고 만다.

이는 일제가 자국에서 들여온 저급한 유녀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예인(藝人)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던 조선 기녀(妓女)들의 가치가 평가절하됨은 물론 성적 이미지의 왜곡이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 된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하에서도 당시 기생(妓生)의 신조와 원칙은 ‘노래를 팔지언정 몸은 팔지 말라(買唱不賣淫)’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기생독립운동 등 애국(愛國)에 대한 열정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진주권번은 1915년 당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진주 기녀인 금향을 비롯한 노기(老妓)들이 다시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재정이 건실한 권번으로 발전되었다. 당시 진주기생조합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뀌고 경영권이 남자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하게 된다.

진주권번은 1939년 11월 2일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자리에 있었다.

 

진주성도의 기방(부분) 계명대학교 소장 진주성도
진주성도의 기방(부분) 계명대학교 소장 진주성도

진주권번의 교육과 가무

국립문화재연구소 중요무형문화재 기록도서인 ‘진주검무’를 보면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진주권번은 기생 100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했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주검무와 한량무를 비롯한 가무를 시작으로 음곡, 산술, 일본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 견습생들은 각 과목당 3개년 수업 연한으로 고전시조, 가야금, 유행가, 서화, 수신, 산술 등 학술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합격자에 한해서는 기생자격을 부여하고, 3개년의 의무 연한제를 제정해 진주 기생의 양성에 목적을 두었다.

진주권번에는 대개 12~13세에 입학했다. 이들과 같은 동기(童妓)들은 예의범절부터 배웠다. 12세 때는 시조, 우락, 계면, 편 등의 가곡을 수련했으며, 춘향가, 단가 등을 교육시켰다. 춤은 검무, 한량무, 신무(神舞), 춘향무 등을 익혔다. 이 가운데 진주검무는 진주권번에서 익히는 중요한 무용이었다. 오전에는 주로 창(唱)을, 오후에는 무용을 수련했다. 당시 진주권번의 무용 선생으로는 김창조(1865~1919)가 유명했다.

중외일보는 1929년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주에서는 권번에 입적하여 기예를 익히는 과정의 기생을 ‘학생기생’이라 하였다. 학생 기생은 3년간 월사금 2원씩을 내고 국악전반에 관해 학습을 하게 된다. 또한 배우는 학과에 따라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따로 수업료를 내야했다.’

이처럼 진주권번은 기생의 양성을 책임지는 교육기관으로 조직을 탄탄히 갖추어 나갔다. 진주를 비롯한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의 권번들은 예능인 배출이라는 목표 하에 다양한 내용과 철저한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진주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의 존재 의의는 예능(藝能)에 있으며, 기생 교육의 본질적 목표가 예도를 구현함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주검무
진주검무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평가

진주교방문화가 가지는 문화·예술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실제로 진주의 교방문화는 전국적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진주만큼 교방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지역이 드문 것이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교방악가무는 우리 전통 악가무의 주역이자 중심이며, 오랜 시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진주교방문화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그 풍류와 멋을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교방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의 필요성은 물론 교방문화가 풀어야 할 숙제인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심포지엄을 비롯한 학문적 접근은 물론 교방문화의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의 노력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올해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에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향후 본격적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비롯한 토론회를 비롯해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교방문화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 진주의 교방문화가 역사속의 전설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사적 가치와 문화예술적인 가치를 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예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승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노력이 더해져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사적 가치가 계승·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진주의 봄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대내외에 꾸준히 알려나가고 있다는 점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 평가에 이견(異見)이 없다면, 이제는 지역사회가 나서서 진주교방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 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의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의암별제
의암별제

황경규(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 상임대표·도서출판 사람과 나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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