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불륜
신성한 불륜
  • 경남일보
  • 승인 2019.01.2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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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전 언론인, 진주기억학교 센터장)
김상진
김상진

“총각, 내 옆에 앉아보소.” 할머니 옆에 앉으니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자리를 뜨려고 하면 두 손으로 붙잡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이길 수 없다. 하긴 94살 어르신이 보기에 60대는 새파란 총각이다. 치매환자들도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사춘기 청소년처럼 순수하다. 마치 리셋된 컴퓨터처럼 깨끗하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88)는 1981년 선임된 미국 첫 여성대법관이다. 유리천장을 깬 강인한 법조인,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판결로 유명하다. 오코너는 치매 걸린 남편을 돌보기 위해 종신직인 대법관을 그만둔다. 당시 “이제는 남편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때”라고 언론에 퇴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아쉬움에 눈물이 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헌신적인 간호에도 남편은 요양시설에 들어갈 정도로 나빠진다. 남편은 아내 오코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되묻는다. 대신에 요양원의 다른 치매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하거나 입 맞추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오코너는 그 여성을 질투하지 않고 정서적 안정을 찾은 남편을 보며 기뻐했다. 항상 자살만 생각 하던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오코너는 요양원을 찾아가 남편과 남편의 애인,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오코너의 이러한 순애보는 미국사회에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오코너도 지난해 10월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면서 공개 활동을 접었다. 같은 요양원에 모신 내 부모가 서로를 몰라보고 다른 이성과 사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또 나의 배우자가 치매에 걸려 다른 사람과 사귄다. 흔치는 않겠지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답은 오코너처럼 하면 된다. 가족들은 과거를 흘러 보내고 부모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치매환자들은 기억력과 인지력을 상실해도 여전히 친밀감이나 애정을 필요로 한다. 무시당하며 가족의 냉대를 받은 치매환자들은 증상이 빨리 나빠진다. 우리 시설에서 자주 소란을 피우는 어르신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가족 사랑을 충분히 받은 환자는 증세가 지연되면서 오랫동안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오코너는 “치매가 있는 삶의 마지막 단계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할지 모르지만 축복받은 내 삶에 대한 감사와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치매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그녀다. 치매환자 100만 명 시대를 앞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델이다.


김상진(전 언론인, 진주기억학교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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