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0)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0)
  • 경남일보
  • 승인 2019.01.3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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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중에 이형기(2)
이형기 시인은 ‘개천예술제 40년사’에 ‘운명의 진로 밝혀준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필자는 이 글을 60년사를 편집하면서 다시 주요 체험기로 주목하면서 실었다. 아래 내용은 그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개천예술제는 1949년 11월에 영남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이형기는 진주농림학교 5학년이었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문학 소년이었다. 그에게는 함께 문학 이야기를 나눌 만한 친구도 없었고 또 지도를 받을 만한 선배도 없었다. 당시 진주농림학교에는 이미 고인이 된 시인 이경순 선생과 소설가 조진대 선생, 그리고 소설가 이병주 선생(아직 등단하지 않은)이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이형기는 그분들을 찾아가지 못했다. 문학을 좋아해서 지도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용기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외롭게 혼자 닥치는 대로 시집과 소설을 읽으면서 간간히 시를 써보곤 했다.

이형기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영남예술제의 한글시 백일장과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백일장의 경우는 미리 준비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웅변대회는 사전에 원고를 써야 한다. 백일장은 장소가 진주공원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백일장 본부인 촉석루에서 자유시와 시조 두 분야로 나누어 시제를 발표했다. 자유시의 시제는 ‘만추’였고 시조의 시제는 기억이 없다. 장르를 둘로 나누었지만 시상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백일장의 심사 결과는 오후 4~5시경 경남일보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이형기는 지나가는 행인인체하고 시간에 맞추어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이름이 장원으로 나붙어 있어 깜짝 놀랐다. 잘하면 입상권에 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은 갖고 있었지만 장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알려 기쁨을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세 동생이 있었지만 2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후론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 가노라고 슬퍼할 겨를도 없는 어머니는 문학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고 동생들은 어렸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채에 세들어 살고 있는 아저씨가 내 말을 듣고 “그럼 이제부터는 시동이라고 불러야겠구먼” 했을 뿐이었다.

가슴 두근거리는 그 밤은 불면이었다. 그러나 용기가 배가가 된 이형기는 웅변대회에 나가 3등을 했다. 웅변대회에서도 1등이었지만 백일장의 장원자가 웅변까지 휩쓸면 너무 편중되기 때문에 3등으로 조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김상옥 시인이 후에 알려주었다. 웅변의 제목은 ‘불! 불! 불!’이었다. 소방서의 불조심 표어 비슷한 제목이지만 8·15해방때 우리가 겪은 뜨거운 감격의 불길을 다시 되살려 온민족이 좌우 대립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로 뭉치자는 내용이었다.

이형기는 웅변의 내용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만 장원한 시는 외우지 못하고 있다. 전체 시 가운데 3행 정도만 기억하는데 “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 한아름 가득 안고/ 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라는 것이 그 3행이다. 장원시는 그 당시 경남일보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6·25때 경남일보가 완전히 불타버려서 지금은 그 보관지도 찾을 길이 없다. 백일장과 웅변의 두 부문에서 받은 상금은 중학생 이형기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다. 백일장에서 차상을 받아 이형기와 함께 상을 받은 사람은 키가 작은 삼천포 중학생이었다. 그가 시인 박재삼이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년 이상을 이형기와 박재삼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시상식이 끝났을 때 진주중학(지금의 진주고교) 제복을 입은 키 큰 학생이 이형기를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아동문학가 최계락 군이었다.이형기에게는 초면이었지만 이형기는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최계락은 전국의 여러 아동잡지에 상당수 동시를 발표하고 있었던 기성 시인이었다. 그리고 ‘문학청년’이라는 동인지의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형기는 평소부터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최계락이 먼저 이형기에게 다가와 인사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형기에게는 커다라 영광이었다. 그날 최계락은 이형기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그가 가리키는 신문의 광고란을 보는 순간 이형기는 온몸이 불같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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