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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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9.02.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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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중에 이형기(3)
문학잡지 ‘문예’에 시 추천 영광
고교생으로 시인의 길 등단하며
진주 전 문화계에서 주목받아



지난 번에 말한 것처럼 제1회 영남예술제 백일장 시상식이 끝나자 진주중학 제복을 입은 최계락(당시 이미 아동문학가로 활약중)이 나타나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들고 온 신문 한 장을 이형기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최계락이 가리키는 신문 공고란을 보자 마자 이형기는 흥분하여 온몸이 불같이 달아올랐다. 그것은 그해 8월에 창간된 권위 있는 문학잡지 ‘문예’ 12월호 광고였는데 이형기의 시 ‘비 오는 날’이 추천되었음을 알리는 활자가 커다렇게 거기 박혀 있었다.

영남예술제의 장원에다 우리나라 ‘문예’지의 추천이란 두 가지 영광을 한꺼번에 차지한 그날의 이형기는 평생에 이처럼 영광스러운 날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는 학교 안에서도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었던 그는 이날 이후 갑자기 진주의 전문화계와 학생사회에 크로즈업 되었다. 그는 그리고 최계락이 주도하던 ‘문학청년’의 동인들과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형기는 그들과 어울리면서 이듬해인 1950년 6월호 ‘문예’에 3회 추천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이로부터 이형기는 당당한 시인이 되었다.

이형기는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서울의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서가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6월에 6·25참화의 청천벽력은 이형기의 기다림을 일시에 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진주의 전 시가와 촉석루까지 잿더미로 만든 그 6·25 때문에 영남예술제는 50년의 제2회 제전을 거르게 되었다.

영남예술제 1회 백일장에서 차상을 차지한 박재삼은 개천예술제 40년사에 쓴 ‘나와 개천예술제’에서 이형기가 장원한 그 때의 분위기를 이야기했다. 아래 내용은 그 박재삼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박재삼은 그 백일장에 처음 나갔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 진주-삼천포 간이 수월하게 오갈 수 있지만 박재삼의 집은 어떻게나 가난하게 지냈던지 박재삼이 고향을 떠나 객지라고 가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 박재삼이 다니던 삼천포중학교에는 김상옥 선생이 교편을 잡고 계셨다. 백일장에서는 시와 시조를 택일하여 쓰게 했는데 제목이 내걸리기를 시는 ‘만추’, 시조는 ‘촉석루’였다. 박재삼은 촉석루의 남강변에서 앉아 썼다. 그날 발표에서 장원에 이형기, 자기는 차상이었다. 그날 밤 진주의 어느 극장에서 낭독을 하게 되었는데 장원과 차상만 낭독했다. 그때 극장의 막후에서 이형기와 인사를 했는데 이형기는 박재삼과의 동년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때 ‘문예’ 11호가 나왔는데 박재삼이 문예지라고 사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이형기의 첫 추천작인 ‘비 오는 날’이 실려 있었다.

이쯤에서 필자는 이형기의 첫 추천작인 ‘비 오는 날’을 최근 나온 ‘이형기 전집’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단순 서정시인데도 단단한 시로 읽힌다. 이 시를 쓴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니까 정말 조숙한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헛글자가 한자도 없다. 당시 서정시의 평균 수준을 보이고 어쩌면 서정의 액자틀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던 때보다 3, 4개월 전에 쓴 것이 분명하다. ‘문예’지가 백일장 시상식때 최계락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 있는 것은 이형기가 ‘문예’지에 추천받을 때 심사위원이 서정주 시인인데 그로부터 23년후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내려온 서정주가 백일장 제목으로 ‘비 오는 날’로 정한 것이다. 어떤 인연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박재삼 이야기로 돌아오자. 박재삼은 이형기의 ‘문예’지 추천이 된 일을 두고 한없이 부러워했다. 중학생의 신분으로 우리나라 기성시단을 노크하는 것도 조숙한 일에 속하고 그랬다손 치더라도 요새 같으면 사전 확인을 하고 취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이 박재삼에게는 많은 자극을 주었다.

백일장 전에 서울에서 처음으로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나왔는데 6호 정도 나오고 자진 폐간이 되었다. 아마 제3호였지 싶은데 전국의 중학생 8, 9명의 작품이 실렸는데 이형기, 송영택, 그리고 박재삼 자기의 시편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나란히 개천예술제 입상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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