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양구리 남명조선생 숭모비
[경일칼럼] 양구리 남명조선생 숭모비
  • 경남일보
  • 승인 2019.02.1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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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옥이 쌓여 있으면 산이 빛을 머금다네”라는 명나라 주영의 ‘잡영’이란 시의 구절에서 따와 옥산이 되었다. 정상아래 너더랑에서 발원한 물이 중봉과 하봉 사이 계곡으로 흘러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앞산 기슭을 돌아나가는 안쪽, 모양이 비슷한 비석들이 있다. 푸른 정기 감돌고 옥수가 배여 있는 좋은 터라 이 마을 태생의 존경받는 인물을 기리는 비석으로 추정된다.

좌측 비석은 돌기둥 울타리로 둘러싸고 양쪽에 사자를 수호신, 대리석 거북을 기단,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용들이 희롱하는 비두를 얹었다. 비신에는 通政大夫世子侍講院輔德(통정대부세자시강원보덕)/知足堂趙之瑞先生事蹟碑(지족당조지서선생사적비)로 새겼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자 가로쓰기 안내판이 걸렸는데 한자 밑에 한글로 토를 달았다.

‘이 비는 이 고장이 배출한 수많은 인물 중 조선 성종시대 충절 뿐만 아니라 학문과 경륜이 뛰어나 조야의 명망을 크게 얻으신 지족당조지서선생사적비입니다. 선생의 묘역과 부인의 정려는 대곡리 삼장동 주변에 있어 오지라 많은 사람들이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이 사적비만이라도 대로변에 건립하여 옥종을 찾는 많은 분들로 하여금 선생의 훌륭한 행적을 본보기로 삼아 오늘날 교육을 되살리는데 보다 나은 효과를 거두기를 바라는 의도로 이곳에 세우게 된 것입니다. 비문 내용을 상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길 건너 옥종주유소에 책자가 비치되어 있으니 활용바랍니다. 지족당선생사적비건립위원회 백.’

안내문을 통하여 학습내용을 정리해보면, 이 비는 지족당조지서선생사적비, 조지서는 조선 성종시대 충절과 학문, 경륜이 뛰어난 인물이다. 충절, 조야, 정려, 오지, 교육 등의 한자는 물론 삼장동(三壯洞) 유래, 치마 무덤의 슬픈 사연을 알 수 있고, 세자의 교육기관 시강원의 강사 편성 및 연산군의 사부로서 종3품 보덕의 직책을 가졌던 조지서의 교육철학을 과제로 삼을 수 있겠다.

사적비와 닮은 우측 비석은 南冥曺先生崇慕碑(남명조선생숭모비)로 새겼다. 남명선생은 삼가에서 태어나 한양 김해 등에서 살다가 61세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산천재가 있는 산청 시천에 거주하였다. 양구리와 어떤 연관이 있어 이곳에 숭모비를 세웠을까!

남명의 조부 조영(曺永)이 감찰 조찬(趙瓚)의 딸 임천 조씨와 혼인하였다. 지족당조지서는 조찬의 아들이다. 남명의 성격 형성에 조찬의 딸이요 조지서의 누이인 조모와 조지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남명이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여행기 ‘유두류록’에서 엿볼 수 있다.

저녁에 하동 옥종 삼장골에 있는 청수역에 이르렀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려문이 세워져 있었다. 정씨는 조지서의 아내이며, 문춘공 정몽주의 현손녀이다. 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가 되어,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면서도 등에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를 지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니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것이 지금에도 이 정문에 남아 있다. 한유한·정여창·조지서 등의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주어 본다면, 십 층의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 하나를 더 얹어 놓은 격이요, 천 이랑 물결 위에 둥그런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다.

남명은 할머니의 친정 삼장마을에 왔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이순신백의종군로 비석조차 없는 양구마을을 지나쳤다고 보기 어렵다. 남명조선생 숭모비 앞에 조지서선생사적비처럼 이곳에 숭모비를 세운 취지와 비문의 내용을 요약한 한글 안내판을 세우고, 안내판과 비신에 QR코드를 부착, 한글 비문을 검색하게 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비석이 되게 하자.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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