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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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9.02.1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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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 중에 이형기(4)

초등학생시절부터 탐독에 심취 ‘소설 미치광이 3총사’로 불려
이형기는 1933년 1월 6일(음력 32년 11월 22일) 경남 사천군 곤양면 서정리 속칭 솥골에서 아버지 이경성, 어머니 김순금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호적에는 1933년 6월 6일로 등재되어 있다. 4살 때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시 강남동 50번지 촉석루 맞은편에서 살았다.

필자는 이형기의 태생지인 사천 곤양면을 찾아가 보았다. 길 안내역을 맡은 이는 전 곤양농협 조합장 한순조 선생과 배창도 시인이었다. 한순조 선생은 한때 통일주체대의원을 지낸 곤양 일대의 유지로서 이형기가 태어난 곤양 솥골에 대해서 잘 알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길잡이로 모신 것이다. 솥골은 곤양읍에서 다솔사로 빠져 나오는 길 오른 켠 양지 바른 곳인데 서편으로 곤양고등학교를 끼고 있었다. 솥을 걸어놓은 형상이라 하여 ‘솥골’이라 했지만 한 조합장이 아는 동네 사람들까지도 거의 없었다.

다만 이형기의 작은 삼촌 이창호(전 진주문화원장) 선생에 대해선 노인 한 분이 알고 있었다 이 원장이 솔가해 진주로 나갈 때 그 집 이씨네 일가들이 진주로 이사해 간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형기니 시인이니 하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형기가 4살 때 나왔으니 이형기를 그 동네에서 아는 사람은 아예 찾을 수가 없던 상황인 것이었다. 필자는 곤양고등학교 들어가서 일직사를 만나 “이 학교에 이 지역의 명사에 관한 자료가 없느냐”고 물었다. 일직교사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출생지를 떠난 사람은 그 출생지에 이름도 흔적도 주변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형기는 이렇게 솥골의 어느 구석에도 지나간 흔적 지나간 일화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순전 100% 진주 강남동으로만 와서 원적지를 삼고 늙어간 것이다. 본적지를 진주시 강남동 50번지로 고정한 채 남강물 바라보다가 촉석루 건너다 보다가 세월을 이마에 뒤집어 쓴 채 일생을 이룩한 것이다.1939년 8살 때 요시노소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일본말로 쓰여 있는데 경남, 부산, 울산에서 제일 먼저 생긴 초등학교 진주중안초등학교인 것이다.

이형기는 이 학교에서 1년간은 조선어를 배웠지만 그 이후의 소학교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된 교육을 받았다. 3학년 때 반대표로 동화구연을 한 뒤 문호가 되리라 결심, 동화 소년소설 잡지 등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여 ‘소설 미치광이 3총사’란 별명을 얻었다. 그때 3총사 중 한사람은 후에 경상대학교 법대 학장을 지낸 강동호 교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동호 학장은 진주에서 감동 주는 주례로 유명했고 한때는 민방위 명강사로 날린바 있다. 이형기는 중학을 진주농림으로 가고 강동호는 진주중학으로 가 서로 진로가 엇갈렸다. 진주농림 2학년때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다.

이형기는 진주농림 학교신문에 김구 선생을 위한 조사와 20매 가량의 평론을 발표하고 당시 연극반 지도교사로 있던 이병주 소설가를 만났다. 당시 이병주는 소설을 쓰기보다 서양 연극에 빠져 원작을 스스로 번역하여 학생들에게 총감독으로 지도해서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후에 이형기는 이때 이병주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주변에서 보고 들은 다음 시인이 되고 평론가로 활약하면서 아무도 쓸 수 없는 해박한 이병주론을 집필했다. 이형기는 앞으로 시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그가 단순히 시장르에만 갇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평필을 들어 순수와 참여, 시와 소설 간의 쟁점들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이른바 한국문단의 평론가로서 뚜렷한 위치를 확보 한 것이다. 당시 60년대의 쟁점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평론가가 이형기의 붓끝에서 작열하는 불꽃으로 힘을 크게 쓰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형기를 한 서정시인으로만 좁게 보고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형기는 이렇게 명민한 평론가로서 입지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석가모니’를 집필했고 수상집 에피그램 등등 스케일이 큰 작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형기의 시 연구는 단순한 인상비평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보다 폭넓은 철힉과 심미적 혜안을 갖추고 나서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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