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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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9.02.2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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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 중에 이형기(5)

조정권 시인의 회상속 이형기
다짜고짜 시를 평해주던 대선배
“니힐리즘의 현대시가 이형기였다”
이형기에 관한 추억담을 기술한 사람은 많다. 그 중에 중진시인 고 조정권의 회고담은 독특하다. ‘가문 날의 꿈’(이형기 시인 기념사업회, 2011)에 실린 조정권의 ‘이형기 선생 회고담’은 순전히 작품에 대해 주고받은 이야기로 눈길을 끈다. 고 조정권 시인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시집으로 ‘산정묘지’ ‘떠도는 몸들’, ‘고요로의 초대’ 등이 있으며 1970년 현대시학을 통해 데뷔했다.

그 글에서 조시인은 다음과 같이 이형기를 말한다.

“한 마디로 표현되는 삶은 없다. 선생의 삶이 그렇다. 시인은 갔다. 모습 없는 환한 모습으로. 그가 누구였는가로 한국 현대시는 허무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허무의 병사였다.” 이형기를 허무의 병사라 부르고 있다. 니힐리즘에 빠진 현대시, 그 현대시가 이형기인 셈이다. 이 대목을 놓고 필자가 볼 때는 이형기는 농림학교 교사를 지낸 진주시인 이경순과의 접점을 만나고 있어 보인다.

동기 이경순은 일제하 동경에서 나라 잃은 백성이 닿을 수 있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을 했다. 일본의 저항운동 단체인 ‘흑우연맹’의 메이데이 행렬에도 가담한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한 쪽에 무산계급 운동이 있고 한 쪽에는 모더니즘 운동이 있다. 나중에 이경순은 모더니즘에 더 악센트를 주었다.

그건 그렇고 조 시인은 이형기를 ‘허무의 병사’라 불렀다. 조시인이 이형기를 만나는 순간을 다음 과 같이 이야기해 준다. “80년대가 저물어 가는 늦겨울 동숭동에서 이형기 선생을 만났다. 문예진흥원 옆을 지나가다 조시인이 이곳에 근무하는 게 생각이 나서 잠깐 커피나 마시자고 하셨다. 시단의 대선배님께서 새까만 후배에게 커피를 사신다니. 차를 시키고 나시더니 다짜고짜로 ‘잘 읽었어, 하이네의 유언시…’ 하신다. ‘아, 그거요?’”

그리고 이어 조 시인이 부산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부산 항만사령부에서 군대생활을 하던 71년 벽두 동아일보 시월평 란에 내 시에 평을 해주신 분이셨고, 부산 시인들의 앤솔로지 ‘남부의 시’ 창간호에 나를 회원으로 시를 실려 주시기도 했다. 나중에 제대후 내가 서울로 귀향했을 때 선생과 나는 한국시인협회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선생과 나와의 인연은 거의 시인협회와 관련된 심부름 일로 맺어지고 있었다. 선생이 읽었다는 하이네의 유언시는 모 월간지에 쓴 내 시작노트를 보았다는 이야기인데 시보다 시작노트가 더 좋다는 말씀이셨다.”

조정권 시인이 자기 시작노트에 인용한 하이네의 유언시는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내 삶의 종말을 맞아/ 나는 유언을 하리라/ 크리스찬답게/ 내 적에게 기념품을 보내 드려야지/ 너희들 존경할 만한/ 유덕한 적에게/ 온갖 나의 병약과 병균과/ 그 밖의 고질병들을 상속시켜 주련다/ 나는 너희들에게/ 핀세트로 배를 비트는 것 같은 아픔을 상속하마/ 그리고 악성의 방광염과/ 프로시아식의 치질도 함께/ 내 경론도 너희들에게 물려주련다/ 침을 흘리는 버릇이며 수족의 풍증과 척추결핵도/ 이것은 모두가 훌륭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니까” 이 하이네의 시는 조시인 말마따나 저주에 가깝다. 신과 역행하는 요마가 날름대는, 뱀 같은 저주! 이런 세계를 이형기는 가까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정주의 30년대식 화사 같은 육성의 울음 같은 세계를 접하고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권 시인은 이 하이네에 경도하는 이형기를 보고 “이런 시를 좋아하는 선생의 젊음을 존경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형기는 이렇게 ‘시적 투지를 자기 갱신의 모험으로’ 과시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형기가 낡은 서정으로 후퇴하지 않고 자기를 늘 갈아끼우는 정신을 가지고 시를 쓴 것이기에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이 지나간 시가 아니라 오늘 현재의 또는 미래의 시로 규정하여 선호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형기의 문학과 시의 현대성에 깊은 신뢰를 보내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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