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④합천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④합천
  • 임명진
  • 승인 2019.02.2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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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수 전국서 가장 많아…해인사 스님까지 독립시위 동참
합천은 지방의 3.1운동 가운데 독립 만세시위가 횟수와 강도면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지역으로 이름높다.

특히 삼가 만세시위의 경우 2차에 걸쳐 여러 읍·면이 대규모 연합시위를 펼치며 이계엽 열사를 비롯한 숱한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삼가만세시위 가장 격렬

합천의 만세시위는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삼가 만세시위는 1919년 3월18일과 23일, 장날을 맞아 두번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다.

1919년 조선주둔 일본헌병사령부에서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과 1936년 경남경찰부의 ‘고등경찰관계적록’에는 삼가장터 일원에 1만여 명이 참여해 사망 5명, 부상 20명, 체포 28명으로 기재하면서 가장 악질이라고 기록했다.

삼가 3.1만세운동 기념비문에는 이같은 내용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기미년 1919년 3월18일 삼가 장날에 쌍백의 정방직, 이원영, 이기복, 이상동 열사의 주도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하자 장날에 모인 500명 주민들이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상황이 심각해 지자, 일본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 이날 밤 8시께 강제해산을 완료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다음 장날인 3월23일이 되자 2만여 명의 군중이 삼가 장터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쌍백의 공재규 열사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을 섰고, 윤병모, 윤구원, 윤구현, 한필동, 김홍석, 윤승현, 윤사언, 허동규 열사는 인근의 삼가, 쌍백, 대병, 봉산, 대의(의령), 생비량(산청) 등의 유림과 유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삼가 장터로 집결했다.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자 대한독립의 당위성에 대한 열사들의 분개가 이어졌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 열사가 단에 오르자 일본 경찰과 헌병이 총격을 가했다.

분노한 주민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지로 노도처럼 몰려갔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총격을 가해 주재소와 면사무소 앞마당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기미년 2월23일 오후 5시 무렵의 일이었다.

◇피해규모 가장 커…해인사 스님들도 동참

당시 희생당한 이들은 박선칠 열사를 비롯해 60여 명(일제측 자료 5명), 부상당한 이는 임종봉 열사 등 150여 명(일측 자료는 24명)이다.

삼가시위는 그 참가인원과 피해규모, 시위의 강도 등을 보았을 때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거사로 손꼽는다.

규모를 축소한 일본측 기록만 보아도 피해가 엄청났음을 확인할수 있다.

일본 경찰과 헌병사령부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과 경찰관계적록에는 18일과 23일 삼가독립만세 시위에 1만 200명이 참가했다고 기록했다.

합천 전체로 보면 1만 4600명이 참여했고 순국자는 합천 전체에서 11명, 삼가 5명이다. 체포자는 130명(대병 54명, 삼가 38명 등)이다.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합천지역 전체에 160여 명이 순국하고 290명이 체포됐으며 518명이 부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3년 공개한 3.1운동 피살자 명부에서도 합천지역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명부에는 당시 피살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는데, 합천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40명이나 된다. 피해지역은 삼가 21명, 초계 10명, 대양 9명이다.

해인사 스님들도 만세운동에 기꺼이 동참했다.

삼가시위가 벌어지고 3월 31일 오전11시 해인사 홍하문 앞에는 수백여 명의 스님과 주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해인사 부근의 주재소로 몰려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일단의 스님들이 체포되고 옥고를 치뤄야 했다.

승려들도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합천의 만세운동은 여느 지역보다 그 강도면에서 훨씬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합천 지역민들의 자부심으로 남아

100년 전 합천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독립만세시위는 합천 주민들의 강인한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합천주민들에게는 선열들의 독립애국정신이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2004년 3월1일에는 이를 기리는 삼가 기미 3.1독립운동만세 운동 기념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기념탑은 합천군 삼가면 일부리 916-10번지에 위치해 있다. 매년 3.1절을 맞아 기념탑 일원에서 기념 추모제를 개최하고 시가행진 등 재현행사도 열고 있다.

임명진·김상홍기자 sunpower@gnnews.co.kr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기개·절개 숭상하는 합천정신 격렬 항쟁 불러”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100년 전 강렬했던 독립만세운동은 합천 사람들에게는 강한 자부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4년 3월1일에는 이를 기리는 삼가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다음은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과의 일문일답.

-삼가장터 등 합천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원인은?

▲삼가 및 합천이 고향인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사상적 영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기개와 절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가장날은 1799년(정조23) 삼가로 귀양 온 화성 출생 ‘문무자 이옥’이 쓴 ‘삼가시장 풍경’에 주옥같이 서술했을 정도로 큰 5일장이다.

1차 만세시위가 삼가장날인 음력 2월 17일(3월18일) 끝나고, 합천면·대양면, 대병면, 묘산면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윤선(우참찬, 정인홍 제자, 1623년 계해정변 후 파직) 후손인 파평윤씨, 남명 조식 외가인 인천이씨, 정질 후손인 초계정씨, 허돈(정인홍 제자) 후손인 김해허씨, 청주한씨, 여양진씨, 김녕김씨, 안악이씨, 권양(현감, 정인홍 제자) 후손인 안동권씨, 분성배씨 등의 문중들이 조직적 집단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대규모로 항거가 가능하게 된 거다.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의무를 망각하고 석연찮게 군대 면제 받고 편한 곳으로 빠지고, 이게 말이 되나. 광복군 장준하와 김준엽은 수기에 이렇게 말했다.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고생을 생각할수록 나라를 빼앗긴 못난 조상이 원망스러웠고, 나는 그런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맞는 것 아닌가. ‘반성과 성찰’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맨날 일본 탓만 하는 것 이젠 끝내야 하지 않겠나.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가장 보람된 일은?

▲삼가 3·1운동 등 우리 합천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원인을 밝히려고 나름의 노력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고향의 독립애국지사를 기억하기 위해 한 분 한 분 이름을 새긴 기념탑과 기념비를 삼가면 ‘독립광장’ 안에 세우고, 책자를 발간하여 자긍심을 높인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특히 13분의 독립애국지사를 국가보훈처(공훈발굴과)에 신청하여 아홉 분이 포상되고, 한 분이 현재 심사 중에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번 삼가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추모제를 마지막으로 내년부터 개최하지 않을 작정이다.

총 500만원으로 기념·추모제를 한다는 건 순국선열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100주년까지만 내실 있게 하자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지난 2003년 기념탑 모금과 건립부터 지금까지 ‘3·1만세운동’에 미흡하지만 노력했는데, 이젠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
김상홍기자

 
합천 출신 이계엽 애국지사 이계엽(1889~1937) 애국지사는 삼가장터 3·1운동 때 ‘기미 삼일운동 백산면, 쌍백면 하신·백여·삼리 일대 대표자 이계엽’이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시위에 앞장서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4년형을 언도 받았다. 아우내 장터 유관순 열사는 3년 형을 받고 출감 며칠 전 1920년 9월 28일 19세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후 이계엽은 가족과 함께 만주 흥룡강성으로 이주, 독립운동을 하다 1937년 만주에서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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