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서양음악을 처음 소개한 책은 이규경(1788~1856)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이 책은 발행된 뒤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으나 육당 최남선이 1930년대 어느 군밤장수의 포장지를 유심히 보고 발견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음악에 관한 17편의 글과 서양음악의 기초이론이 실려 있다. 서양음악은 1884년 전후로 외국인선교사가 한국에 전파하여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아펜젤러, 스크랜턴, 언더우드 등이 세운 학교에서 창가(唱歌)라는 이름으로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창가는 1879년 일본 문부성이 신교육령을 반포할 때 등장한 용어다. 1920년대에는 창가에서 예술가곡으로 발전하였다. 예술가곡은 시어를 아름다운 선율에 실은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아름다운 예술가곡을 많이 작곡하고 한국적 화음과 선율의 독창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남겨 ‘한국의 차이코프스키’라는 찬사를 받은 이는 이상근(1922~2000)이다.
이상근은 딜레당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입문하여 20세기를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로 성장했다. 이태리어 딜레당트(dilettante)는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예술이나 학문에서 전공자는 아니지만 이를 열렬히 애호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상근은 한국 클래식이 성장한 1950년대, 현대기법을 적극 도입한 진보적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이미 10대 후반부터 가곡을 작곡하고 20대 초반 각종 콩쿨을 통하여 한국 음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젊은 시절 독학으로 이룬 그의 작품은 윤이상, 나운영과 함께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근은 이미 진주고보 재학시절 양주동의 시에 곡을 붙인 ‘해곡’을 작곡했다. 1947년 ‘새야 새야’를 작곡했다, 우리가 부르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노래하는 전래동요를 채보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1952년 우국충정을 담은 유치환의 시를 음악으로 만든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를 작곡했다. 이 곡은 작곡 직후 사라졌다가 55년만에 발견되어 지난 2006년 1월 고문서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해 6월 진주에서 감격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마산중 교사였던 김춘수의 시에 선율을 입힌 가곡 ‘구름과 장미’, ‘늪’, 청마 유치환과 신달자의 시에 붙인 불멸의 연가곡 ‘아가Ⅰ’, ‘아가Ⅱ’,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청령가’, 시인 이상의 시에 곡을 붙인 ‘오감도’ 등도 명곡으로 남아있다.
이상근은 한국음악사에 많은 ‘최초’를 낳았다. 실내악 발표회(1952년 부산 이화여대 강당), 한국가곡 논문발표,음악전문 출판사에서 피아노곡집 발간, 도민의 노래 작곡 등은 그가 처음이다. 1956년 창단된 국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이 1998년까지 가장 많이 연주한 한국 작곡가는 이상근이다. 과묵하고 담백한 성격의 이상근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 의미없는 기교나 무리한 편성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라고 지도했다. 오랫동안 즐기던 담배를 고혈압으로 끊었으나 병석에 오래 누워 있다가 2000년 11월 가을 낙엽과 함께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진주시가 매년 주최한 ‘이상근 국제음악제’의 조속한 부활을 기대한다.
최임식(LH 지역상생협력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