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⑤하동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⑤하동
  • 임명진
  • 승인 2019.02.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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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독립선언서 1919년 3.1독립만세시위 당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독립선언서로 그 내용이 하동군민들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원본이 보관돼 있다.
하동 독립선언서 1919년 3.1독립만세시위 당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독립선언서로 그 내용이 하동군민들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원본이 보관돼 있다.

 

‘(중략~)최후의 1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치 말고 인도와 정의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어허라, 대한 광복과 동양 친목과 세계평화가 금일로부터 실현되얏소. 분기하고 맹진하라. 우리 반만년 신성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錦繡)의 강토를 유(有)한 우리의 동포여’

-하동의 3·1독립선언서 중 일부-

 
하동 독립공원


하동은 영호남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일찍이 동학 농민운동과 영호남 의병들이 상시 활동했던 곳이다.
일제의 무력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하동은 숱한 항일투사들의 활동무대가 됐다.
그런 하동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필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편집자 주

지역에서의 3·1만세시위 대부분은 장날을 이용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거리를 누비는 것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진압에 상황이 악화돼 하동과 합천 등 일부지역에서는 심각한 사태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하동의 3·1만세시위는 그 횟수에서 17회나 걸쳐 일어나 경남지역에서는 단연 가장 많은 만세시위가 펼쳐진 곳으로 나타났다.

하동에서의 만세시위가 규모와 횟수 면에서 타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은 하동 사람들의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하동악양청년회가 발행한 ‘하동의 독립운동사’에서는 하동의 3.1독립만세 운동 효시는 1919년 3월13일 하동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사건이다. 양보면 출신으로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와 정성기, 정윤기의 주도로 시작된 이날의 시위는 군민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이에 적량면장 박치화는 3월14일 돌연 사표를 내고 18일 하동읍내 장터로 나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박치화의 돌발적인 행동을 바라보던 읍민들과 장터 상인들이 모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일제의 ‘조선소요사건’이라는 기록에도 3월18일 하동군 적량면장은 하동읍내 장날 시장 중앙에서 소금포대 위에서 하동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며 군중을 선동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동의 3·1운동은 여러 면에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하동의 독립선언서는 1986년 하동 적량면의 박치화 선생 고가의 천정 속에서 발견됐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독립선언서로 하동사람들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진솔하게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치화 등 12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서울의 3·1독립선언서와는 차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독자적인 지역의 독립선언서라는 점이다. 둘째 비폭력 운동을 명시하고 있다. 셋째 민족자결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만세시위와 함께 살포함으로써 하동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기개를 타 지역에까지 떨쳤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하동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며 일본의 탄압에 맞섰다.

하동사람들의 나라를 향한 애국심은 당시 초등학생들도 만세시위에 가담해 일본경찰을 놀라게 했다.

4월6일 화개장터에서 승려인 김주석의 주도로 정상근, 양봉원 등 학생들의 거사가 있었고 4월7일 하동읍내에서 박문화, 전석순, 정정금 등 하동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시장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학교 소풍날이라 학생들을 광평송림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박문화 등 4학년들이 몰래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장에 다다랐을 때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채소정, 오명례 등 여학생들도 가담한 돌발 사태에 놀란 일본은 헌병대가 출동하는 등 사태진압에 나섰다. 박문화는 적량면장을 지낸 박치화의 친동생이다.

그는 진주형무소에 끌려가 징역 6월형을 받아 복역해야 했다. 5월1일에는 대한독립만세라는 삐라가 하동읍내 곳곳에서 뿌려진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은 학생들의 소행으로 보았다.

김덕우, 손구석, 최인영, 김채환, 성효경 등 학생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런 나라를 위한 하동 사람들의 애국정신은 계속 이어져 1926년에는 지역 항일독립운동 거점인 하동청년회관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하동청년회관은 항일 독립정신 함양과 민족정기 고취에 힘썼다. 1927년에는 대표적 민족주의 독립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에 조동호, 윤영박, 조용선, 하만석, 강우석 등의 하동사람이 대거 참여했다.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하동사람들의 애국정신은 기미 3·1운동이 지나고 하동청년회관을 건립하고, 8년 뒤인 1927년에는 일제의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도 제2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규모 집회가 또다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하동 군민들의 애국정신과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동에는 하동읍을 비롯한 옥종, 청암, 악양 등 곳곳에 항일투사 기념비가 건립돼 이들 애국지사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기미 3·1독립만세 시위 당시인 3월 24일 하동 옥종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인근 산청과 진주지역 사람들도 가세한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됐다.

그 규모만 최소 2000명에서 최대 60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옥종면에 2015년 높이 11미터의 항일투사추모탑 설립하는 추진위원장을 지낸 양일석 전 도의원은 “기미년 3·1독립만세시위와 함께 옥종면 일대서 일본군과 처절한 전투를 하며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전사자 117명의 독립운동가의 공을 기리는 추모탑을 건립한 데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독립 운동가 한 분 한 분의 활동내역을 표기해 후손들에게 우리 지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뿐 아니다. 정몽석, 강우석 등 하동 출신으로 진주 등 타 지역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들도 다수다.

1972년에 편찬된 ‘하동군지’에 의하면 3·1만세시위 당시에 하동에서는 독립만세시위 17회, 사망자 17명, 행방불명 95명, 부상자가 50명이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하동지역 독립만세시위 17회 참가인원 1만 2000여 명, 사망 17명, 부상 95명, 체포 5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그 횟수와 피해규모를 놓고 보았을 때 하동의 독립만세시위는 뜨거웠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박치화 선생


하동의 박치화 애국지사

박치화 선생은 하동의 3·1독립만세시위에 있어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적량면장을 지내다 1919년 3월14일 직을 내던지고, 3월 18일 하동읍 장터에서 하동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군민들의 만세시위 동참을 이끌어 냈다.

그의 이 같은 행동은 하동지역의 만세시위에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하동의 독립선언서 제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독립선언서는 1986년 적량면의 그의 고가의 천정 속에서 그 원본이 발견됐다.

박치화 선생의 동생 박문화도 독립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박치화 선생의 아들 박성무도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발견돼 현재 서훈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것으로 한 집안에서 3명이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가히 독립유공자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동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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