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⑦마산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⑦마산
  • 이은수
  • 승인 2019.02.2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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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행에 항일의식 들불처럼 번지다
3월 3일 고종 국장행사서 최초 “대한독립만세”
창신학교·의신여학교 전 교사 사직서 제출 참가
태극기 등 보부상 가장·여학생 치마폭 숨겨
일경 탄압 속 마산 공립보통학생들도 참가
창원지역은 1899년 마산포가 개항되면서 러시아와 일본 등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외세의 침투가 어느 곳보다도 빨랐다. 일제의 불법적인 토지 매수, 일본 전관거류지의 설치, 진해 군사항 설치, 일제의 철도부지의 수용, 마산 시장권의 탈취 기도, 마산항만 매축권의 탈취 등 일제는 마산부와 창원군의 모든 이권과 경제적 침탈을 자행했다. 일제강점 이후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전 부문에서 식민지 지배정책을 펴면서 마산·창원 지역사회에서는 일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 더 나아가 항일의식이 한층 고조돼 갔다. 이런 항일 열기가 팽배하는 중에 1919년 마산부와 창원군, 지금의 창원시 지역에서 3·1독립의거가 일어났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항거차원에서 3·1독립의거가 지역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마산 3·1독립의거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3·1독립의거가 일어났다. 당시 마산지역은 기독계통을 통해 서울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3일 ‘민족대표’ 이갑성이 몰래 마산에 와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을 만났고, 그를 통해 부교장 이상소도 만났다. 경남을 대표하는 민족대표 1명을 추대하기 위해 이갑성이 마산에 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2월 26일 이갑성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을 마산으로 보냈으나 민족대표 수락 서명을 받지 못했다. 3월 1일 이른 아침에 이갑성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에게 독립선언서 400여 장을 대구와 마산에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3월 1일 오전 8시 이용상은 서울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3월 2일 마산에 도착했고, 마산부 표정(중성동)에 살던 임학찬을 만나서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했다. 임학찬은 다시 이형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그중에서 30장을 김용환에게도 주었다. 


 

3월 3일 두척산(무학산) 자락에서 고종의 국장 행사가 열렸는데, 김용환이 군중들에게 ‘우리 조선은 당연히 독립해야 하며 나라를 독립하려면 우리가 모두 과감하게 일어서야 한다’고 외치며, 독립선언서를 뿌렸다. 또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학생들은 준비해 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구마산 거리를 다니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000∼4000여 명의 군중이 구마산 지역을 돌며 오후 4시경까지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날 40여 명의 시위 참가자를 일제가 체포해 갔다. 이날의 거사가 마산 3·3만세의거다.

이후 명도석·최용규·이정찬 등이 비밀리에 모여 3월 10일 추산정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3월 10일 10시경에 추산정 근처 예비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나 일제에 발각돼 모두 마산 경찰서에 구금됐다.

김용환이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해 그를 제외한 주동자 전원이 훈방됐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경계와 감시는 더욱 심해갔다.


이 무렵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마산에 와서 의신여학교 여교사 박순천에게 전달했다. 문창교회 지도자, 그리고 창신학교·의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서둘러 준비했다. 창신학교에서는 설립자 이승규의 아들 이은상 방에서 한태익·이정기·이일래 등 학생 대표가 모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의신여학교에서는 교사 박순천(박명언)·김필애 등의 지도를 받아 상급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 최봉선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했다.

3월 12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전 교사는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들은 만세운동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지만 순수 일반인의 입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것처럼 보여, 학교와의 관련성을 차단하려고 미리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최용규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시위 계획을 이형재·명도석·이정찬·최동락·신택식 등 마산지역 민족주의자들과 협의해, 거사 일을 3월 21일 구마산 장날로 정했다. 당시 구마산 장날은 음력 매달 5일, 10일에 열렸고, 경남에서 가장 큰 장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다. 3월 21일 구마산장은 장꾼들과 장을 보러온 사람들로 부산했다. 시위 준비물은 보부상을 가장해 시장 안으로 운반됐다. 여학생들은 치마폭에 태극기를 감추어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구마산장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오후 3시가 되자, 주동자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일제 경찰은 시위 행렬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게 되자, 마산 일본군 중포병대대 21명과 마산 일본군 헌병분견소 헌병 7명을 지원받아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진압했다.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경찰은 주동자 50여 명을 검거해 마산경찰서로 끌고 갔다.

 

다시 3월 26일 구마산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오후 2시 40분 군중이 단결해 구마산 석정통(창동)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 중포병대대 군인과 경찰 등의 총검 앞에서 시위대가 진압되고, 주동자 14명이 체포됐다.

3월 31일 오후 4시 구마산에서 약 2500여 명의 군중이 2시간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일제 중포병대대 군인과 경찰의 폭력적 탄압으로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할 수 없었다.

1919년 3월 마산지역에서는 4차례에 걸친 대규모 독립 만세 의거가 일어난 후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았다. 1919년 4월 22일 마산 공립보통학교에서 3·1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조선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마산 공립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22∼24일 3일 동안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에 놀란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학생을 달래고 위협하는 등 노력했으나 그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학교 측에서는 경상남도 학무국에 사실 보고를 했고, 일제 당국은 4월 24일 자로 휴교 조처를 내렸다. 당시 마산지역은 시민, 학생 심지어 보통학교 어린 학생조차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분노와 민족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3·1독립의거에서 그 분노와 열망을 표출했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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