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⑧창원 진해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⑧창원 진해
  • 이은수
  • 승인 2019.02.2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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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무 창원시장이 간부공무원들과 함께 진해 3.1운동기념비를 찾았다.
허성무 창원시장이 간부공무원들과 함께 진해 3.1운동기념비를 찾았다.

 

창원은 뜨거운 호국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대표적인 항일의 고장이다. 1919년 3월 3일 마산 3·3 만세운동(김용환 등이 고종의 망곡제에 참석한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마산지역의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그해 4월 29일 창원 상남면 사파정 3·1만세운동까지 약 2개월간에 걸쳐 항일 독립의거가 진행됐다. 특히 진해 군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많은 이권이 일제에 넘어가는 등 일제의 경제적 침탈은 더욱 심해갔고, 웅천면·웅동면 지역은 전통적으로 항일 저항정신이 강한 곳이 됐다.

◇ 창원읍 3·1독립만세운동

창원읍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2일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시위였다.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상남면 토월리에 사는 배중세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창원면 동정동에 사는 설관수에게 전해주었다. 설관수는 공도수를 비롯해 구재균·김호원·조윤호·신갑생·조희순 등과 함께 중동 청년회관에서 비밀리에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 일을 3월 23일 창원읍 장날로 결정했다. 공도수는 독립선언서 500여 장을 만들고, 송종민과 김호원은 태극기 500여 개를 만드는 등 시위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3월 23일 오후 2시 20분경이 되자 6000∼7000여 명의 많은 사람이 장터에 모여들었다. 창원보통학교 교정에서 주동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장 한 가운데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자 참가한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외치니, 그 함성은 천지에 진동했다. 일제 헌병주재소의 군인과 경찰만으로는 시위대를 진압할 수가 없게 되자. 마산 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 군인 26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총검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오후 5시 20분 시위군중은 물러섰고, 일제는 시위를 주도한 31명의 시위참가자를 체포해 갔다. 1차 독립만세 시위에 이어 2차 시위도 계획·추진됐다. 창원지역 15명의 청년이 4월 2일 창원읍 장날을 거사 일로 결정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았다. 4월 2일 오후 3시 장날에 많은 사람이 장터에 모여들자, 창원지역 청년 15명이 중심이 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 시위를 펼쳤다. 시장 안에 있던 6000∼7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해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이날 만세시위는 제1차 시위보다 더 강력한 형태로 펼쳐졌다. 마산에 있는 일본 중포병대대의 지원 병력이 급파됐고, 일제가 총검을 앞세워 20여 명의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면서 시위대를 겨우 해산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창원읍 시위에 참여한 지역민이 얼마나 끈기 있는 저항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진해면 3·1독립만세시위

진해지역에서는 4월 3일 경화동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기로 그 계획이 정해졌다. 대정학교 교사 문임현이 주동자가 되어 거사를 준비했으나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던 문임현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거사가 어렵게 됐다. 그렇게 되자 문임현의 매제인 이현진(우을룡, 1905∼1981)이 대정학교 3학년생인 이복근·신기옥·김재복·손임조·이용식·이석수 등과 같이 다시 시위를 계획했다. 4월 2일 저녁 7시에 경화동 마을 복습방에 모여서 군중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만들었다. 벽보도 우현진이 문안을 작성하고, 신기옥과 이복근이 직접 글을 써 만들었다. 거사일 새벽 2시에 각자 태극기와 벽보를 품 안에 감추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벽보를 붙였다. 태극기는 당일 경화시장에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당일 새벽에 붙인 벽보가 일제 경찰에 탄로 나 이복근과 우을룡, 신기옥 등이 체포되면서 4월 3일 진해면 3·1독립만세시위는 실행이 되지 못했지만, 그 울림만 있는 채 미완의 시위로 남게 된 3·1독립운동이었다.

◇ 웅천면·웅동면 연합 3·1독립만세운동

웅천면과 웅동면은 조선시대 웅천군에 소속된 지역으로 웅천면에는 왜관이 설치된 적도 있었다. 두 지역은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주둔하여 지역민이 고역에 빠지기도 했던 곳이었다. 근대 개항 후에 이들 두 지역은 일제의 경계적 침탈 등으로 많은 이권을 일제에 빼앗겼던 곳이었다. 특히 진해 군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많은 이권이 일제에 넘어가는 등 일제의 경제적 침탈은 더욱 심해갔다. 이처럼 웅천면·웅동면 지역은 전통적으로 항일 저항정신이 강한 곳이 됐다.

이 지역의 3·1독립운동은 웅동의 계광학교 교사 주기용이 4월 3일(음력 3월 3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웅천면의 정운조·문석주·김병화를 찾아가서 본격적으로시위를 계획했다. 웅동에서 일어난 시위대가 웅천읍에 오면 웅천 시위대가 합류하기로 계획하고, 주기용을 비롯한 주도 인물들이 비밀리에 서로 연락하면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의 거사 준비에 만전을 다했다.

웅천면과 웅동면 지역민들은 두 지역 합동으로 3·1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1919년 4월 3일 일본 헌병주재소가 있던 웅천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정했다.

웅천에서는 김창업·정운조·김중환·문석주·김석환·김병화·김진찬·주국녕 등의 주동자들이 김재형의 집(웅천 북부동)에서 비밀리에 거사 계획을 세우고,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의 여성들은 웅천교회에서 모여 거사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웅천의 정운조·문석주 등이 사전에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면서 웅동시위에 차질이 생겼다. 즉 주동자의 체포로 치밀하게 계획된 웅천면과 웅동면의 연합 시위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에 체포된 주동자들은 고문 중에서도 웅동면과의 연합시위를 발설하지 않아서 만세시위는 계획대로 추진돼 같다. 당일 웅천시위대는 웅천현 읍성의 동문과 옹성 사이에 있던 쇠전(우시장)에 모여 웅동시위대를 기다렸으나 약속한 시각 11시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아서 김창업이 군중 앞으로 나가 연설한 후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정기부가 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문에서 서문 거리를 오가며 만세시위를 하면서 연합시위를 위해 웅동시위대를 기다렸다.

웅동시위대가 나발등 고개를 넘어오자 시위군중의 만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웅동시위대가 성내동으로 밀려 들어왔다. 웅천시위대와 웅동시위대가 만나 연합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연합시위를 펼쳤다.

웅동면의 3·1독립만세시위는 4월 3일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웅동시위대가 웅천면으로 넘어와 웅천시위대와 연합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웅동지역은 계광학교 교사인 주기용·배재황·허전 등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시위 준비를 하였다. 지역 인사 배건수·이원우와 청년 김일성·배종인, 서울 유학생 이부근· 이종인 등도 거사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4월 3일 아침부터 웅동 지역민이 마천리 말냇가(馬川邊)에 모이기 시작했고, 10시가 지나자 2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주기용이 군중 앞에 나와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어서 이부근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군중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니 그 함성이 온 동네에 울려 펴져 나갔다.

시위군중이 “가자, 가자”라고 외치자, 자연스럽게 시위대 행렬이 만들어졌다. 주기용 등 주동자들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시위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펼쳤다. 김갑술이 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그뒤를 주기용·이종인·이부근 등 주동자들이 따르면서 웅동시위대의 행렬이 만들어지고 시위가 시작됐다. 오전 11시 웅동시위대는 400~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웅동면 사무소로 가서 시위를 한 후에 웅천시위대와의 연합 시위를 위해 나발등 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향했다. 웅천에 도달했을 때 웅동시위대는 2000~3000여 명이 넘었다.

웅동시위대가 성내동 쪽으로 내려와 읍성 안으로 들어오자 웅동과 웅천시위대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웅천의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고 한다.

웅동시위대와 웅천시위대가 연합하여 웅천읍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자 일제 헌병주재소의 헌병과 일본 거류민들이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폭력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아무런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시위대는 일제의 무력 앞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32명의 시위자가 일제에 체포됐다. 이들 중에서 주기용·이부근·김일성·배종인·이원우 등 6명의 중심인물은 검거됐고,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주기용은 1년 6개월 형, 이부근·김일성·배건수·배종인은 1년 형, 이원우는 6개월 형을 각각 언도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됐다. 이에 앞서 웅동에서 체포된 정운조·문석주·김병화는 3개월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배재황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고자 진영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도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총각 낭군 주려고 구운 떡을
독립군 오도록 기다리네
조선의 독립 다 되었네


1919년 4월 3일 웅천면·웅동면 연합 3·1독립만세운동의 거사 일이 다가오자 산에 오르는 나무꾼 사이에서 불렀던 노래다. 당시 지역민의 민족독립과 그 염원을 엿볼 수 있다.

◇ 상남면 사파정 3·1독립만세 시위

1919년 4월 29일에 일어난 창원 상남면 사파정 3·1독립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1시 상남면 사파정 일본군 헌병주재소의 서쪽 방면 약 400m에 위치한 진해와 창원 간 도로상에서 일어난 시위였다. 약 50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제 헌병이 시위 진압을 위해 현장에 출동했을 때에는 시위군중이 해산한 다음이었다. 만세시위의 주동자는 현장에서 검거되지 않았다. 그 주동자를 찾기 위해 일제 헌병들은 인근 마을을 불법적으로 수색하는 등 주동자 체포하려고 나섰지만 끝내 검거하지 못하고 말았다. 상남면 사파정 3·1독립만세 시위와 관련된 구체적인 문헌 사료가 없어 자세한 시위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19년 3월 1일 이후 일어난 3·1독립운동 중에서 경남지역의 마지막 3.1독립만세 시위로 알려져 있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여성들이 한복을 입고 1919년 기미년 창원 3·1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창원 3·1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
창원 3·1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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