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⑨ 창원 4·3 삼진의거(馬山三鎭義擧)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⑨ 창원 4·3 삼진의거(馬山三鎭義擧)
  • 이은수
  • 승인 2019.03.0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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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의사 창의탑.




창원 4·3 삼진 의거는 3·1 운동 절정기에 폭발한 전형적인 민중적 민족 운동의 한 형태로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진동면·진북면·진전면 세개 면의 연합 시위였다. 이 4·3 삼진 의거는 경기도 수원 지역의 장안면·우정면 의거, 안성 지역의 원곡면·양성면 의거, 충남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 의거, 경남 합천 의거, 평북 정주·선천 의거, 의주 주상면 의거, 황해도 수안 의거 등과 함께 3·1 운동 사상 대표적인 항쟁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4·3 삼진의거는 지역의 지식인 학생 농어민 등이 앞장서서 일으킨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마산부와 창원군 지역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운동에 대한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오후 1시경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나라를 빼앗긴 군중의 평화적인 시위에 일제가 탄압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마산 주재 육군 중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 중 6명은 6개월에서 1년형을 선고 받았고, 5명은 태형(笞刑) 또는 집행 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3월 28일 시위에서 검거를 피한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





 
4.3독립만세운동 삼진연합 대의거 재현행사.




◇ 일제 감시 피해 초계 변씨 사당에서 ‘거사’ 도모

중심인물 석당 변상태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거사를 도모하면서 안전하고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택했다. 그곳이 바로 성구사다. 성구사는 고려 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킨 충신(두문동 72현) 중 한사람인 변빈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변연수 장군, 그리고 그의 아들인 변립의 충절을 기리던 사당이다. 초계 변씨 가문의 충절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자, 독립운동 모의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었던 것이다. 경내에는 일신재(日新齋),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변상태 등은 주민동원 방안을 논의했고, 역할을 분담했으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 나라위해 장렬히 숨진 8의사의 뜻을 기리는 팔의사창의탑이 고현마을 입구 진동면 사동교 옆에 있다. 1946년 지방민들에 의해 사동교 건너 암벽에 처음 창의비가 세워졌고, 1983년 10월에 지역 주민들의 발원으로 현재 위치에 탑이 건립됐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은 순국한 8명의 의사를 상징하고 있다. 탑에는 “1919년 4월 4일 김수동·변갑석·변상복·김영환·고묘주·이기봉·김호현·홍두익 등 8의사는 수천 군중의 앞에 서서 우렁찬 조국 독립 만세를 외치다 헌병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이에 우리 지방민은 8의사가 쓰러진 바로 이 자리에 탑을 세워 길이 그 뜻을 남기고 알리고자 한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이시여, 그날 그 때의 거룩한 뜻으로 계례의 앞날을 지키고 밝히소서.”라는 삼진 지방민들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




◇ 수천명의 민중 함성 드높았던 4·3삼진의거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진동 쪽으로 나아갔다. 오전 10시경 집결 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 진동면·진북면·진전면의 삼진 지방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을 넘었다. 이에 변상태는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이며 자유 국민이다. 일제의 간섭을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된다.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어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인구가 적은 농촌마을에서는 실로 대단한 규모였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오후 2~3시경, 사동교에서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팔의사 묘역.





◇ 전국 4대 의거 평가 … 순국 8의사 건국훈장 애국장


4·3 삼진 의거는 4월 3일 전개된 제2차 의거만을 일컫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적 맥락에서는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시장에서 발발한 제1차 의거와 4월 3일에 일어난 제2차 의거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두 시위 모두 같은 지역 주민에 의한 동일한 투쟁 대상과 목표를 공유했으며, 계획 단계에서 전개까지 주동자와 가담자가 동일해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의 의거는 수원 제암리 의거, 평안도 선천읍 의거, 황해도 수안 의거와 함께 전국 4대 의거로 평가받고 있다. 수도권과 거리가 멀고, 인구가 많지 않은 농촌지역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그 규모가 매우 컸고, 주동자들이 ‘십인장’, ‘이십인장’이라고 쓴 수건을 머리에 둘렀던 것으로 보아 매우 조직적이었다. 살벌한 일제감시에도 지역민은 십시일반 성금을 내어 부상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8의사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삼진 지방의 만세 시위 주동자로 검거된 변상태·변종열(卞鍾悅)은 징역 2년, 권영조·권영대·변상섭·구수서(具守書)·권태용(權泰容)·김영종(金永鍾)·변상술(卞相述)·변상헌(卞相憲)·변우범(卞又範)은 징역 1년 형의 옥고를 치렀고, 이들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권오규(權五奎)·권태선(權泰璿)·백승인(白承仁)·서정규(徐正奎)는 징역 6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들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 人터뷰

김정대 창원시 근현대기념사업추진위원장, “창원 4ㆍ3 삼진의거 기념관 건립 추진한다”

창원 삼진의거, 조직적·젊은층 동참 두드러져

이달부터 ‘자랑스러운 근현대사 시민 교육’ 실시


 

김정대 창원시 근현대기념사업추진위원장.


“창원은 기미년 3~4월 두 달에 걸쳐 모두 열세 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4대 의거 중 하나인 4·3 삼진의거가 열린 중심도시로 대한민국 근대사의 큰 획을 남겼습니다.” 김정대 창원시 근현대기념사업추진위원장은 올해는 3·1절 독립만세운동과 임정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정대 위원장은 “창원지역 3·1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변상태 등 서울과 지역을 연결짓는 지사들에 의해 매우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됐으며, 젊은 층의 동참이 두드러진 것”이라며 “도심에서의 시위가 일제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여의치 않게 되자 외곽 농어촌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 절정이 4월 3일 삼진 만세 운동이었다”고 운을 뗐다. 김정대 위원장은 이어 “젊은 층의 적극적인 동참과 함께 희생자도 많았는데, 창신학교 학생 한태익·이정기·이일래 등과 의신학교 학생 최봉선·안음전 등은 학생 대표로 삼일 운동에 동참했다”며 “특히 삼진 만세 운동 때 순국한 8의사 가운데는 김수동ㆍ변갑섭만 기혼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혼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두익은 당시 17~18세로 추정되는 청소년이었다”고 밝혔다.

삼진의거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김 위원장은 “한 군(郡)에 속한 면민 모두가 일치단결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자 의의다. 당시 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의 수는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8000명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동의 인구가 1987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가자 숫자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게 된다”며 “일제가 기만적인 ‘문화 정책’을 표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설명했다.

창원지역의 만세운동은 100명이 넘는 애국지사와 시민·학생들이 목숨을 잃거나 체포·구금됐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아진 민중들은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을 성장시켰는데, 특히 1960년 3·15 의거의 정신적 토대가 됐다. 김 위원장은 “3월 1일 애국지사 추모제와 추념식을 비롯해 창원 곳곳에서 범시민 동시 만세운동 및 거리행진이 펼쳐졌다”며 “올해는 마산항 개항 120주년, 부마항쟁 40주년,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자랑스러운 독립 만세 운동 정신을 되새기면서, 이를 창원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의 하나로 삼고자 하는 것이 기념사업의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3·1절 행사를 시작으로 삼진 지역 및 웅동 지역 4ㆍ3의거 재현 행사, 창원 역사 바로 알기 제3회 백일장 대회, 범시민 만세 운동을 개최한다. 신규 사업으로는 내 고장 독립 만세 운동지로 떠나는 역사 기행, 독립 명문가 발굴 및 인증 사업, 창원 독립 운동사 책자 발간, 독립 운동 학술 심포지엄, 광복회 독립 운동 유적지 탐방, 4ㆍ3 삼진의거 기념관 건립도 추진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끝으로 “기념관 건립은 허성무 시장의 선거공약이기도 해서 매우 의미있게 추진될 것이다. 이 기념관은 삼일만세의거 정신을 바르게 알고 전승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이 기대된다. 무엇보다 ‘의로운 도시 창원’이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힘쓰겠다. 이를 위해 3월부터 ‘자랑스러운 근현대사 시민 교육’도 실시할 계획”이라며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 석당 변상태 선생 “맹활약”

변상태 선생의 역할은 삼일 운동을 주도하는 중앙의 의거 관련 의지를 경남 서부 각 지역의 애국지사들에게 전달하고, 각 지역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석당이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결성에 참여했고, 또 비밀 결사인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을 결성한 항일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지역 조직과 관련된 몇 예를 들면, 3월 초순에 이광우, 김재화 등과 진주 의거를 계획한 일, 신종목과 거창 의거를 협의한 일, 3월 중순에는 함안군 군북면 사촌(舍寸) 조용태의 집에 머물면서 군북 의거를 준비하고 지휘한 일, 3월 하순에는 고향인 진전(鎭田)으로 와서 동지 권영대, 권태웅, 권태선, 백승인, 황태익 등과 함께 중종 선실(中宗先室) 일친재(日親齋)에서 4월 3일의 삼진의거를 계획하고 우선 3월 28일의 고현 장날 만세 운동을 도모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변상태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한 혐의로 징역 2년형의 궐석재판을 받았고, 1922년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44년 진주에서 이주현, 구여순, 장두관 등과 함께 ‘고려 구국 동맹’을 조직해 독립 운동에 진력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삼진독립의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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