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⑩산청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⑩산청
  • 임명진
  • 승인 2019.03.0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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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한일독립유공자추모비
   
"왜적이 우리나라에 강요하여 합방조약을 맺을 때 10년 후에 독립권을 반환한다 하더니 이 맹약을 위배하고 오히려 고종 황제를 독살하였으니 우리의 불공대천지원수라. 제군은 수적에게 애걸하니 그 어찌 그렇게도 비겁한가"
 
1919년 3월20일 산청 단성면 성내리 시장에서 독립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대에 일단의 군중들이 붙잡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본 헌병분견대장이 나타나 ‘남의 유혹에 빠져 시위에 참가한 자는 손을 들라,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말하자 김상호 지사가 홀연히 일어나 이렇게 꾸짖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일제강점기 당시 3.1만세의거를 기록한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일부다. 당시 산청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만세의거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남의 만세의거는 비록 타 지역에서 보다 늦게 시작되었지만 어느 지역 못지않게 격렬하게 이어졌다.

산청은 서부경남에서 가장 치열한 만세의거를 전개한 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대표적으로 단성, 단계 3·1만세의거와 산청읍 만세의거가 있다.

산청의 단계 3.1만세의거와 단성 만세의거는 3월19일부터 21일에 걸쳐 일어난 의거로 이 과정에서 희생자도 많았던 의거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일본 헌병이 발포해 시위에 앞장서다 순국한 애국지사가 11명, 부상자 수십 명, 잡혀 고문을 받고 복역한 이 또한 수십 명이었다.

산청 사람들은 당시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투철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세의거가 일어난 단성면 성내리에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를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기미년 3월1일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해외까지 노도처럼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고 때를 같이 하여 이곳 산청·단성·신등·신안 등지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동년 3월 21일 도내 장날에 거사하였다. 그 때 순국한 선열을 비롯 항일독립투쟁에 옥고를 치룬 수많은 우국지사와 무명의 애국선열의 투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빛내기 위하여 군민의 이름으로 1995년에 만세의 진원지 도내장터에 세워졌다’라고 적혀 있다.

 
 


◇신등·단성의 3·1만세의거

3월19일 산청의 유학자 김영숙 선생과 그의 아들 상준, 권숙린, 정태륜 등이 주도해 신등면 단계장터에 나가 독립 만세시위를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삼엄한 경비에 장터에 가기 전에 체포되고 만다.

이들은 계획이 틀어졌지만 체포 와중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저항하자 길가의 수많은 군중들이 이들을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했다.

체포되지 않은 주동자들은 다음날인 3월20일 단계시장에서 재봉기를 결의했다. 마침내 당일 오후2시께 시장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그 기세를 몰아 단성면 성내리 시장으로 향했다.

당황한 일본 군경은 거창과 진주에서 병력을 차출해 주동자들을 긴급 체포했다. 일본 군경은 남의 유혹에 빠져 시위에 참석한 자는 풀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애국지사인 김상호 등은 단연코 이를 거부했다.

3월21일 단성의 도내장터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만세’라고 쓴 대형기를 앞세워 거리행진을 벌였다.

일본 군경들이 이를 진압하면서 정태륜, 김상호, 김영숙 등의 핵심인사들이 검거됐다.

이를 본 격분한 군중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일본 군경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정용수 지사는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만세를 외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산청 한일독립유공자추모비


◇산청읍 3·1만세의거…사전발각에도 결행

신등, 단성의 만세의거는 산청지역에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산청읍 3.1만세의거는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 전에 발각됐다. 그런데도 군민들과 상인들이 시위를 전개해 산청의 항일독립 의지를 당당하게 표출한 사건이다.

당초 산청읍의 만세의거는 민영길, 신몽상 등이 주도가 돼 신등, 단성의 만세의거에 뒤이어 3월2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거사를 위해 포섭한 산청군수 홍승균이 일본 헌병대에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끝날 위기에 처했다.

일본 헌병대는 3월21일 오전 1시께 신영희 지사의 집을 수색, 독립선언서 등을 압수하고 신몽상 등 주동자들을 차례로 검거했다.

주동 인물들이 체포되고 당초 약속했던 22일 산청읍 장날이 됐다. 여느 때 장날처럼 수많은 군중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을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주동자들을 체포해 일본은 안심하고 있었으나 이때 갑자기 누가 주도한 줄도 모른 채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울러 퍼지기 시작했다.

만세의 함성은 장터에 나온 군중과 상인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장터는 태극기와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깜짝 놀란 일본 수비대가 이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 많은 군중들이 부상을 당했다.



 
허학수 산청문화원 향토연구소 소장


산청문화원이 펴낸 산청항일운동사에는 ‘시위 군중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금서면 덕촌리 민치방 투사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위 군중들 앞에 서서 지도하다가 일경의 총검에 가슴 부분을 찔렀다. 그는 한평생 불구자의 몸이 되어 한쪽 팔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금서면 사평리 박응양 선생은 군도에 맞아 귀와 팔을 절단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산청읍 시위를 주도한 항일투사들은 시위 전에 체포돼 각종 고문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었다. 광복 후 민치방, 신몽상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 대통령 표창에 각각 추서됐다.

산청읍 만세의거는 사전에 발각되었지만 무산되지 않고 실행됐다는 점에서 산청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허학수 산청문화원 향토연구소 소장은 “산청의 만세운동은 단성과 산청읍 등지에서 유림과 학생, 일반 군민이 모두 다함께 참여한 평화로운 시위였으나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에 많은 이들이 숨지거나 다쳤다. 붙잡힌 애국지사들도 숱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100주년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애국지사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효근 산청문화원장
 

[인터뷰]이효근 산청문화원장

산청은 나라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조직해 왜적을 격파했고, 나라를 빼앗기자 또다시 의병전쟁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다음은 이효근 산청문화원장과의 일문일답.

-산청의 만세의거를 평가해 본다면

△우리 산청은 예부터 나라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중시해 왔다. 지리산의 영향으로 호연지기가 넘치고 남명 조식선생의 학풍을 계승해 기개와 절개를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으로도 이름 높다. 그런 이곳에 독립만세의거는 당연한 일이다.

-산청을 중심으로 3·1만세의거에 버금가는 파리장서사건이 있었다.

△파리장서 사건은 3·1만세의거를 체험한 산청의 유학자, 면우 곽종석 선생 등이 주도가 돼 137명의 전국 유림대표가 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선비들의 대표적인 독립의거이다.

면우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에 체포돼 2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법정에서도 꿋꿋하게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우리 산청은 이런 선비들의 기개를 기리는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또한 남사예담촌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는 다양한 선비문화를 소개하고 후손들에게 그들의 기개와 뜻을 알리고 있다.

-3·1만세의거 100주년을 맞았다. 그 의미를 평가해 보자면

△나라를 빼앗기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자 희생을 했다. 그런 선열들의 숭고한 뜻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셨던 애국지사들의 이름 석 자라도 후손들이 제대로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산청문화원도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일에 늘 앞장설 것이다.


 

산청 한일독립유공자추모비

 

※파리장서사건
산청을 중심으로 일어난 파리장서사건은 3·1만세운동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이다.
면우 곽종석 선생이 전국의 유림 137인을 규합, 앞장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장문의 편지를 써 우리의 독립 정당성을 호소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함께 기념하고 있으며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는 이를 기념하는 유림 독립운동 기념관이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산청 한일독립유공자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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