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⑪함안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⑪함안
  • 여선동
  • 승인 2019.03.0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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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최초 함안 칠북 연개장터 만세의거
기독교인 중심으로 활발하게 시위 전개
군북 만세의거는 가장 많은 희생자 발생
함안군의 3·1독립만세의거는 경남지역에서 가장 빠른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에서 의거가 일어났다. 이후 만세의거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장터 시위, 18일 칠서면 이룡리 시위, 19일 함안면 읍내시위, 20일 군북면 시위, 28일과 4월 3일 칠원면 시위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펼쳐졌다.

함안지역의 만세의거는 규모와 전개과정에서 삼남지방에서 가장 치열한 곳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함안 칠북 이령 초등학교 삼일독림운동 기념탑


◇칠북면 연개장터 만세의거

함안 칠북 연개장터 3·9독립만세의거는 경남 최초의 만세의거로 기억되고 있다. 경남의 기폭제가 되었던 연개장터 만세의거는 당시 칠북 이령교회가 중심이 돼 일어났다.

1919년 3월 9일 연개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적 행진을 벌였다. 3·1독립만세의거의 비폭력 저항정신에 따라 일본경찰과 물리적 충돌 없이 끝난 경남 최초의 독립만세 의거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연구소는 2006년 12월 발간한 ‘3·1운동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1919년 3월9일 함안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터의 만세의거가 경남 최초의 의거라는 점을 밝혔다.

연개장터에서 최초의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칠북 이령교회의 장로인 김세민 선생과 그의 사위이자 독립운동가 배동석 열사와 인연이 있다.

김세민 선생이 서울의 3·1만세의거의 준비상황을 전하니 김두량, 김순 등 29명이 교회에 모여 준비모임을 갖고 3월9일 연개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대책위원으로 여봉준, 곽성복, 김주현을 선임해 사람을 동원하고 태극기를 만들도록 했다. 이때 서울에서 내려온 김정오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날 연개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집결했다. 정오가 되자 대회장을 맡은 김세민 선생이 개회사를 하고 유광도의 격려 연설에 이어 김정오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군중들은 영서 ,영동, 상봉촌을 돌면서 해가 저물 때까지 ‘대한 독립만세’를 불렸다.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기조에 입각해 기물을 파손하거나 해하는 일 없이 자진 해산했다. 연개장터의 의거는 이렇게 평화적으로 막을 내렸다.


 
군북 3.20 독립운동 기념식


◇기독교인 주축 만세의거 잇따라 일어나

당시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함안에서는 이령교회를 중심으로 한 연개장터 독립 만세의거에 이어 3월 12일과 17일에는 함안대산교회가 주동한 평림의거가 일어났다.

특히 칠원에서는 3월 23일과 4월 3일, 8일, 13일에도 연달아 만세의거가 일어났다.

배동석 열사는 3월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로 운동에 참여하고 5일에는 남대문 역 앞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됐다.

배 열사는 1919년 11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의 형을 받고 복역을 마치고 고향 김해로 돌아왔는데 눈알과 손톱도 모두 빠지고 없었으며 심한 고문에 병을 얻어 1921년 숨졌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정오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자가 돼 석방됐다. 1980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함안의 3·1만세의거는 연개장터 만세의거를 시작으로 대산 평림, 칠서 이룡, 함안읍, 군북, 칠원 등지로 확산되면서 경남의 3·1독립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함안군은 칠북 3·1독립기념회 주관으로 매년 연개장터 만세운동을 널리 알리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군북 공설운동장 3.1독립운동 기념탑


◇군북 3·20만세의거

‘3·20 군북 독립만세의거’는 박상엽, 김삼도, 이재형, 조성술, 조용태 ,조문제, 노수정, 이점수, 조문규씨 등 동리 책임자들이 백이산 서산서당에 모여 거사 계획을 구체화 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서산서당과 원효암에서 제작하기로 했다. 20일 군북장터에서의 시위는 전날 함안읍내 시위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다.

제1단계는 덕대리 남단 신창야학교에서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2단계는 인근 냇가에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오후 1시 정각이 되자 조상규가 둑 위에 올라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용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그 함성이 백이산에 메아리쳤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신창, 소포, 안도를 행진하는 도중 장터 상인들과 밭매던 농부와 아낙네까지 차례로 합류해, 어느새 5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대 등이 출동해 진압에 나서자 양측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군중들은 일 군경의 위협에도 해산하지 않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포병대와 헌병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는 참상으로 이어졌다.

이날 만세의거에서 사망자 남자 21명, 여자 1명, 부상자 남자 17명, 여자 1명이었으며 일본측은 1명 사망, 부상 군경 12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나 사상자 면에서 다른 지역의 만세의거를 압도했다.

함안 사람들은 일제의 총칼에도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저항했던 그날의 만세의거 재현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항일독립운동 유공자와 유가족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애국지사 선양과 보훈사업, 역사 재조명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여선동기자 sundong@gnnews.co.kr


 
김동균 함안문화원장


[인터뷰]김동균 함안문화원장

“함안의 100년 전 만세의거는 함안사람들의 애국심과 충절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동균 함안문화원장은 “경남 최초의 칠북 연개장터 3.9독립만세의거는 서울에서 독립운동 시위를 참관하고 돌아온 14명의 유지를 중심으로 추진된 독립운동으로 3월6일 새말예배당에서 29명이 모여 3월9일 의거키로 결정해 연개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경남의 만세의거의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함안지역은 3·1독립만세의거를 비롯해 1924년 조열녀 왜경피살사건, 1932년 군북공립보통학교 항일시위, 군북농민조합사건, 1935년 동창야학교사건, 1939년 법수항일시위, 1940년 함안초 운동회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이성숙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난 충절의 고장으로 통한다.

김 원장은 “100년 전 3·1독립만세의거는 칠북 ·대산· 칠원 지역은 기독교 세력이 중심이 된 반면 함안읍과 군북면은 지역유림이 중심이 된 의거로 함안의 지역민이 합심해 애국의 혼을 불살랐다”고 강조했다.

함안의 3·1만세의거로 총 92명의 애국지사가 체포돼 복역했다.

당시 마산형무소 관할 형을 받은 애국지사들을 보면 마산 42명, 창원 41명, 통영 23명, 창녕 23명 등으로 함안이 월등히 많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보훈처에서 집계한 경남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에서 알 수 있다.

김 원장은 “함안의 만세의거는 태극기를 앞세워 주재소, 면사무소, 등기소 등 일본 관리가 주재하는 곳을 대상으로 정면충돌도 불사했다. 일본군의 총칼 위협에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만세의거를 펼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점을 볼 때 함안의 3·1운동은 반제국주의 투쟁인 항일 운동임과 동시에 반자본주의 투쟁의 성격까지 띠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앞으로 함안의 3·1만세의거 재현행사는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교육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면서 “경남 최초의 칠북 연개장터 만세의거는 현재 그 문헌이나 재판기록 등이 부실해 학술토론회 등을 열어 당시 활동한 인물과 그 후손들을 찾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경남도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여선동기자 sundong@gnnews.co.kr

 
 
 
군북 3.20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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