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⑬통영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⑬통영
  • 임명진·강동현기자
  • 승인 2019.03.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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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한산대첩광장에서 열린 통영만세운동 기념식.


통영에서 만세의거를 벌이다 체포된 통영기생 이국희는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는 죄목을 따지는 일본인 판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와 간부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판사가 말하길 ‘물론 본부를 섬겨야 옳지’

이국희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풍해문화재단이 펴낸 ‘통영의 독립운동’은 100년 전 뜨거웠던 만세의거의 흔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기미년 당시 통영은 경남의 3대 도시 중 하나인 대도시였다. 항구도시로 일본과의 교역이 많았고, 따라서 거주하던 일본인의 수도 단연 많았다.

◇진평헌 등이 지핀 통영 만세의거

그런 이곳에 독립만세의거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은 3월 8일의 일이었다. 이날 밤 통영사람 송정택의 집에 진평헌 등 18명의 청년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진평헌은 당시 서울에서 배재고등학교를 다니다 1919년 3월1일 서울의 독립 만세의거에 참가하고 통영으로 귀향했다. 고향의 지인들을 만나 통영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고 자체적으로 통영 사람들의 애국정신을 일깨우는 격문을 작성했다.



격문인 ‘동포에 격하노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오라, 형제여! 대도(大道)에로, 모옥(초가)에서, 피나는 일터 죽음의 공장에서, 염라의 광굴에서 어서 바삐 나오라! 괭이 들고 산에 간 내 형제여! 그물 들고 바다로 간 내 동포여! 기심 뜯던 들판에서, 베짜던 배틀에서, 내 누이여! 큰 거리로 나오려므나!(중략)’

격문은 일제의 야만적인 수탈상을 적시하는 한편 적극적인 투쟁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탄로가 났다. 학생들이 격문과 태극기 등을 만들기 위해 백지 2000매를 대량 구입해 간 상점이 다름 아닌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이었기 때문이다. 진평헌, 권남선, 김형기, 배익조, 양재원 등이 차례로 검거됐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내란 미수죄였다. 일본은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진평헌, 권남선 김형기 등 3명은 징역 1년을, 양재원, 배익조 등 6명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지만 이들 중 이학은 모진 고문의 여파로 끝내 숨졌다. 허장완도 부산감옥에서 복역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2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들의 의거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의기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통영최초의 만세…여성이 주도

통영 최초의 만세시위는 유치원 보모였던 3인의 여성으로부터 시작됐다.

통영의 유치원 보모인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 등이다. 이들은 서울의 3·1만세의거가 일어났음을 알고 3월 13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뜻을 모았다.

거사를 앞둔 3월 10일 진평헌 등이 검거되면서 일경의 경비가 삼엄했지만 그대로 결행에 옮겼다.

그녀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장터의 군중에게 나눠주며 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독립만세의 외침은 군중의 호응을 얻었지만 출동한 일경에 곧바로 진압되고 말았다. 체포된 그녀들은 이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복숙은 ‘옥중감상회답문’을 통해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길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떠 옮기지 못할 것이다.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을지언정 강철같이 굳은 우리 마음은 굽힐 수 없을 것이다’

진평헌과 여성들이 지핀 불씨는 통영의 곳곳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3월14일에는 군청 고원 3명, 면서기 4명, 산림기수 1명 등 조선인 관리들이 주동이 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다가 체포됐다.

이성철·이봉철 형제는 3월18일 통영 장날에 만세의거를 일으켰다. 이들 형제는 오후 3시 무렵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수 백 장을 군중에게 나눠줬다.

형제 중 이성철은 체포돼 태형 90대를 맞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끝내 숨졌다.

그날 밤에는 17세의 박상건이라는 학생이 서호동에 있던 관란재 학당에서 학생 20여 명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통영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던 김상진은 22일과 23일 부도정, 길야정 거리 곳곳에 격문을 살포하다 붙잡혔다.

본격적인 만세의거는 3월28일 시위가 기폭제가 됐다.

포목상을 경영하던 김재욱은 박성일, 이봉철, 신형두 등과 함께 3월 28일 중앙시장 장날 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는 통영에서 가장 뜨거웠던 4월2일 만세의거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통영 3·1운동 기념비. 지난 1972년 9월 충무시민의 이름으로 남망산 광장에 세워졌다가 1991년 원문공원으로 이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통영 4·2만세의거

4월2일 만세의거는 3000여 명 이상의 인파가 참여한 통영에서 최대 규모로 꼽는다.

고채주, 박상건, 김영중, 김두옥 등이 주도가 돼 결의문 1000여 매를 등사해 장날에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고채주와 강윤조는 오후 3시무렵 장터의 가장 높은 단 위에 올라 준비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들의 선창에 장터의 상인들과 군중들이 호응에 나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으로 장터가 떠나갈 듯 했다.

시위대의 선두에 선 통영 기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생들은 군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외쳤다.

당시 통영 기생들을 처벌한 판결문에도 이 같은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른바 ‘기생단 판결문’에는 ‘통영의 정홍도, 이국희가 주도해 기생단을 결성, 그들이 애써 모은 금비녀와 금팔찌를 팔아 33명의 기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고 기록돼 있다.

33명의 숫자는 민족대표 33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기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듯이 그 숫자를 33인으로 맞춰 그들의 만세의거에 진정성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었다.

기생들의 활약을 지켜 본 통영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일경은 헌병대 등을 동원해 강제진압에 나섰지만 통영사람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날 주동 인물 9명이 검거됐다. 이 가운데 이국희 등 3명의 기생이 포함됐다.

통영기생들의 활약상은 그동안 별다른 기록이 없어 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최근 재판기록이 공개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통영의 만세의거는 모두 6회에 걸쳐 이뤄졌다. 여성으로부터 시작해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 기생과 상인, 상인, 어민 등 모든 계층이 힘껏 만세의거를 벌였다는 점, 통영 자체의 격문이 만들어졌다는 점 등에서 타 지역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두 달여 동안 모두 85명의 애국지사가 체포됐다.

임명진·강동현기자 sunpower@gnnews.co.kr



 
지난 1일 통영만세운동 기념식 후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김미옥 통영시의회 기획총무위원장

[인터뷰] 김미옥 통영시의회 기획총무위원장

“3·1운동은 무엇보다도 민중의 민족적 각성과 자각이 촉진돼 항일운동의 저변을 확대한 데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통영시의회 최초 선출직 여성의원이자 3선의원인 김미옥 기획총무위원장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그는 “시민과 후세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통영만세운동 기념사업에 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미옥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통영만세운동의 의미를 평가해 본다면.

▲당시 통영에서는 모두 4번에 걸쳐 6회의 시위가 연이어 전개됐다. 특히 통영에서 최초로 성공한 만세 시위가 유치원 보모 등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과 기생들이 독자적인 시위대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통영만세운동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이에 대한 소회는.

▲지역 12개 시민단체와 205명의 시민들이 제안한 내용을 바탕으로 ‘통영시민 선언문’을 발표한 점이 통영시민 선언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감회가 남달랐다. 하지만 통영만세운동과 같은 지역항일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복원사업이 미흡한 부분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다.

-평소 통영 3·1만세운동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

▲통영의 항일·계몽운동 중심지였던 통영청년단회관을 ‘근대(항일)역사관’으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몇 년 전 ‘근대건축물 보존과 활용 방안’ 세미나를 개최했고, 이를 계기로 현재 ‘통영시 근대건축물 조사 및 기본계획’을 수립 중이다. 지난해 9월에는 시의회 5분 자유발언을 통해 ‘통영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필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올해는 ‘통영시 독립유공자 지원 조례안’을 대표 발의해 유공자와 유족을 예우,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시의회 차원의 3·1운동 기념사업 계획은.

▲우선적으로 통영청년단회관의 ‘근대(항일)역사관’ 실현이다. 근대역사관은 일제의 억압에도 면면이 이어져온 통영 정신을 교육하는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다. 또한 ‘호주선교사의 집’ 복원운동을 펼치겠다. 첫 만세운동의 주역 유치원 보모들이 몸담았던 진명유치원을 운영한 곳이다. 이밖에도 ‘통영시 항일운동 미서훈자 발굴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강동현기자 kca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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