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기억
잊혀지지 않는 기억
  • 경남일보
  • 승인 2019.03.1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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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웅(전 진주문화원 부원장)
출퇴근 시간 만원버스에 반백의 노인이 올라탔다. 그는 타자마자 조금 거칠게 사람의 틈새를 헤집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30대 청년이 앉아 있는 곳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앉은 승객들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가 일어나 자리를 내주라고 다그치는 듯 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음 정류장, 맨 마지막에 한 여학생이 간신히 틈사이로 헤집고 들어와 그 노인 옆에 바짝 다가섰다. 노인 바로 옆에 앉았던 청년이 얼른 손을 내밀어 여학생의 책가방을 받아 주려했다. 순간, 그 노인은 얼른 그 손을 힘주어 막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차 타고 다니는 학생들 사정 봐줄 필요 없어, 내가 몇 달째 아침저녁으로 이 차를 타고 다니지만 학생들이 노인에게 자리 양보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모두 모른 체 한단 말이야”

청년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버스 안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도 버스 안은 무관심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특히 책가방을 받아주려던 청년의 얼굴은 멋쩍어 보였다.

생각해보자. 노인이 나이를 앞세워 배심 좋게 함부로 내뱉은 언행이 아무래도 어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물론 나이 든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면 이만저만 피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남들 생각도 해야 한다. 젊은이나 학생들도 직장에서 학교에서 종일 시달리고 탈진 상태가 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길이다.

어른의 아름다움이 뭐겠는가. 관용이다. 책가방 받아주는 걸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피하려는 청년을 모른 척하고 넘어갔어야 노인다웠을 것 아닌가. 또 청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인이 다가왔을 때 자리를 양보했다면 버스 안은 평온무사 했을 것이다.

마음에 타인이 용납된 상태는 곧 희생이요, 그것을 생기게 한 원동력은 사랑이 된다. 사랑이 깃들면 남도 염려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오늘도 우리 서민들은 출 퇴근 시간에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 안에서 불편을 겪어야한다. 그러나 그 고역도 내 마음 속에 남을 용납하는 공간을 만들 때 그리 힘들지 않게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남녀가 서로 엉켜서 앞 다툼을 하는 따위의 만원버스 안에서의 추태는 없어져야하겠다. 요즘 질서 수준이 향상되고는 있지만 사회의 저변에 돌아가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무웅(전 진주문화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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