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⑮거제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⑮거제
  • 김종환
  • 승인 2019.03.12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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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는 아주동 3·1만세의거 기념탑에서 지난 2011년부터 매년 3·1절을 기념해 대한 독립만세 운동 재현행사를 ‘아주 5·2만세 운동’이란 이름으로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거제에서 3·1만세의거가 있었던 날이 1919년 4월 3일로 알려지면서 올해 처음으로 4월 3일에 거제의 3·1만세의거를 재현하는 첫 행사를 열 계획이다. 거제의 3·1만세의거를 재조명한다.


◇아주장터, 거제 만세의거의 시작

1919년 4월 2일 밤 아주 장터 부근의 이선이의 집에 마을 출신 청년들이 모였다. 윤택근(당시 28세)은 이 자리에서 이인수(당시 20세), 이주근(당시 21세), 윤덕근 등에게 3일 아주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해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

때마침 이주근도 서울에서의 고종황제 국장을 보고 귀향했다. 그는 당시 각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독립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거제지역에서 시위를 벌일 것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함께 참여했다.

이인수는 이채수와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4월 3일 당등산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격문’을 마을 곳곳에 붙였다.

낮 12시쯤 200여 명의 민중이 모이자 윤택근이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 이공수, 이주근, 이인수, 이주무, 윤사인, 주종찬 등의 주동인물은 지형이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섰다.

윤택근이 ‘대한독립 만세’를 먼저 외치자 참여한 군중들 모두 ‘대한독립 만세’를 당등산이 떠나갈 듯이 외쳤다.

태극기를 흔들며 울분을 터뜨린 이들은 모두 아주장터로 내려갔다. 장이 섰던 탓에 2500여 명의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들은 미친 듯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이 비 때문에 헌병들의 사격은 중지됐다. 이 틈을 타 주민들은 흩어져 몸을 숨겼다. 주종찬과 옥포주민들은 배암바위 모퉁이 길을 달려 옥포로 가면서 계속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아주장터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주동자들과 주민들은 일본 헌병과 대치하다 헌병의 총격에 긴급 대피해 해산했다.

일본 헌병들은 주동자 색출에 혈안이 돼 아주 아양과 옥포 일대를 샅샅이 뒤져 4일 윤택근을 비롯해 여러 명의 청년들을 잡아갔다.



 
 


◇옥포에서 이어진 만세의거

4월 3일 아주 당등산에 이어 두 번째 거제 만세의거는 4월 6일 옥포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당등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종찬과 천주교 교도들이 중심이 돼 은밀한 계획을 짜고 일요일인 4월 6일 오전 11시 옥포 중앙에 있는 망덕봉(옥포초등학교 뒤 국도변에 거북 머리모양을 한 동산)에서 주종찬이 주도한 주민 2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제창했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아주장터까지 행진을 했다.

대나무를 잘라 종이에 ‘자주수호 대한독립 만세’의 글을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힘차게 행진하는 광경을 본 주민들도 길가에 나와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아주장터에 나온 사람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종찬을 선두로 시위대는 아주에 있는 이운면사무소를 점거하고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친일파 매국노들은 각성하라!’ 는 분노의 찬 함성을 내 질렀다.

울분에 차 있던 청년들은 당시 이운면장인 정달화의 부탁으로 다시 만세를 부르다 해가 질 무렵 자진해산했다.

당시 서당을 운영하던 주금주씨는 직·간접적으로 이날 시위에 참여했고, 주형찬도 직접 시위에 가담했다. 주동자로 분류된 주종찬은 투옥됐다.



 
 



◇거제의 항일투쟁 토대 마련

당등산과 옥포에서의 독립만세 의거로 윤택근, 이인수, 이주근, 주종찬 등 1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구속됐다.

두 차례에 걸친 독립만세 의거로 주종찬과 윤택근, 이인수, 이주근 등이 1919년 4월 21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법정에 섰다.

윤택근과 주종찬은 징역 1년, 이인수, 이주근은 징역 8월을 각각 선고 받았다.

윤택근, 이인수는 대구형무소에서, 이주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주종찬은 1919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판사의 심문에 즉석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일심(一心)’이란 글을 써서 판사에게 던져 판사와 참관인들은 이 광경에 놀라 재판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거제지역민들에게 애국충정의 높은 정신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나와 거제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과 심한 나병으로 국산마을 뒷산에서 움막생활을 하다 1933년 8월 23일 세상을 떴다.

이밖에도 지역마다 소규모의 만세의거는 이어졌다. 거제, 둔덕, 사등, 장승포 등지의 각 읍면 대표들이 통영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거제지역의 독립만세의거는 이후 일제 강점기 기간 동안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끌어낸 정신적·사상적 토대를 만들어 냈다.


김종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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