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⑯고성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⑯고성
  • 김철수
  • 승인 2019.03.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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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헌병 총칼 위협에도 의기 꺾이지 않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3.1운동 창의탑


기미년 3·1독립 만세의거는 1919년 3월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전개된 일제 강점기 최대 민족운동이다.

고성에서도 만세시위 의거가 전개됐다.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고성읍에서 3회, 구만면과 회화면에서 4회 등 모두 7회가 일어났으며 참여한 인원만 수천 명에 달했다.

고성군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에서 독립 만세시위를 하다 주모자로 체포·투옥된 허재기 선생을 비롯해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기록에 남아 있는 독립투사는 40여 명에 달한다.

현재 고성군 회화면에는 이러한 항일운동 열사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의 뜻을 높이 받들어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지역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3.1만세의거 창의탑이 세워져 있다.


 
고성읍에 위치했던 철성의숙



◇고성읍 만세의거(철성면 쌀 시장터 만세시위)

기미년 3월 15일 진주에서 이주현이 철성의숙으로 찾아와 박거수, 박진완에게 고성에서의 독립 만세의거 거행을 설득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돌아갔다.

이에 박거수와 박진완은 배만두, 이상은, 김상욱 등과 함께 거사를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을 상의하고 3월 17일을 거사일로 정한 후 박거수의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는 사전에 누설되어 3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들이 배만두를 검거하면서 계획했던 만세의거는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만세시위 주동자인 배만두가 구금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고성지역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3월 22일 안태원, 서주조를 중심으로 학생 200여 명이 고성읍 시장에 모여 전격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탄압과 주동 인물들의 검거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고성 사람들에게 독립을 향한 커다란 자각과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4월 1일에는 김진만, 문상범 등이 철성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자 김진만 등은 가지고 나온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어시장으로 이동했다.

시위규모가 점차 커지자 고성 헌병대에서는 사천의 헌병 분견대의 지원군과 재향군인, 소방대원까지 동원해 총검을 휘두르며 해산에 나섰고 심지어는 일본 상인들까지 엽총을 들고 나와 제지하는 상황까지 전개됐다.

이것을 보고 격분한 문상범은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었으나 총검에 맞아 선혈이 낭자한 채 쓰러졌다.

일본 헌병이 문상범을 체포해 끌고 가는 등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자 군중들은 울분을 억누르며 일단 해산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동한 김진만, 문상범, 김상욱 등 7명의 애국지사는 일경에 체포돼 마산으로 압송, 실형을 선고받았다. 문상범은 6개월, 김진만은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과 회화면 배둔장터 만세운동


구만면에서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갔다가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최낙종, 최정원이 고성으로 돌아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이종홍 등의 인사들과 비밀리에 회합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20일로 정하고 구만면을 관통하는 국천 모래사장에서 모일 것을 결행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은 한문학자 이종홍에게 부탁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이것을 필사해 보안을 위해 밤중에 12개 동리에 전달함과 동시에 각처에 이를 알렸다.

3월20일 오후1시께 구만면에서 울려 나온 나팔 소리는 각 동리에 퍼져나갔으며, 이 나팔 소리를 신호로 시위군중은 국천 모래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먼저 군중 앞에 등단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허재기가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했다.

군중의 시위대열은 10리쯤 떨어져 있는 회화면 배둔장터로 향했고 이 정보를 입수한 고성 헌병분견소에서 헌병과 경찰관을 동원해 총기를 든 채 도로의 중간을 차단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총검으로 무장한 헌병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했고 일본 헌병은 이러한 기백에 눌려 물러서자 군중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저지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배둔장터에 도달했고 참여한 인원은 700~800여 명에 달했다.



◇대가면 송계리 의거, 상리면 오산 의거, 영오면 의거

1919년 4월 2일 고성군 대가면 송계리 사림강습소의 만세시위는 송계리 주민 300여 명이 참여했다.

상리면 오산의거는 앞서 3월 28일 오산리 삼거리에서 전개되었는데, 한일동, 한기원, 진택성, 진정성, 진윤성, 진구성, 진갑성, 진인성, 진익성 등을 중심으로 50여 명이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4월 3일 영오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옥천사 승려 의거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합방 이후 여러 분야에서 구국 독립운동이 전개될 때 직·간접적으로 활동한 지역의 승려들도 적지 않았다.

고성 옥천사의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은 호국사상이 투철해 3·1독립만세의거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선우협 등이 옥천사를 드나들며 나라 일을 논의할 때 숙식을 제공해 주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신화수는 1921년 전국의 동지를 규합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승복을 벗고 농사꾼으로 변신한 채로 영오면 오동리에 거주하는 서정윤과 함께 거사를 논의했다.

하지만 고향 친구였던 이경렬이 일본 헌병의 앞잡이가 돼 신화수 등의 계획을 밀고하면서 체포됐다.

고성군은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과 100년 전 독립만세 의거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8년부터 배둔장터 독립만세의거 기념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를 기점으로 매년 기념식 및 재현행사, 백일장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김철수기자 chul@gnnews.co.kr

 

박거수
배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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