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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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9.03.1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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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 중에 이형기(7)

언론 통폐합 후 진주에 머물던 시인
빈영호 등 경상대 인사들과 교류
이후 언론을 떠나 대학에 몸 담아
필자가 경남문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마산의 어느 강당에서 ‘경남문협 하계 세미나’를 개최했을 때였다. 이형기 시인을 발제자로 모시고 진행했는데, 시작하기 전에 잠시 이 시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강희근 시인, 이번호 ‘현대문학‘에 발표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눈 맞추기>가 좋았어요”하고는 필자를 정색으로 바라다보는 것이었다.이 시는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한국 천주교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위해 방한한 교황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본 뒤에 쓴 작품이었다. 교황은 한국 순교 박해사와 순교역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교항청이 주재하는 시성식을 한국의 현지에 와서 개최한 것이었다.

필자는 전국 천주교 신자 200만이 모이는 그 여의도 시성식에 천주교 진주봉곡동 교회 평신도 회장으로서 전신자들과 더불어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 하루 전 오후 2시에 교황은 서강대학교 마리에홀에서 천주교 지도자들과 우리나라 대표 지성인 450여명을 초청하고 1시간여 <카톨리시즘과 문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도 참석하여 2층 제일 뒷줄에 앉게 되어 먼 빛으로 교황을 보게 된 것이 운이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교황은 1시간 내내 한 곳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한 줄씩 한 줄씩 또는 구석과 구석을 샅샅이 훑어나가며 눈을 맞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테면 “여어러어분!”만 하면서도 한 줄에 있는 청중을 살파며 눈을 맞추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하여 한 시간이 지날 때는 청중의 눈빛을 다 섭렵해 간 것이라는 기적 같은 ‘눈 맞추기’가 실현되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었다. 마치고 나와서 진주지역 참가자들끼리 특히 김수업 교수 등과 눈맞추기에 관해 말했을 때 대부분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이 신자들 개인 개인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교황의 경우도 그런 모범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필자의 시 <교황 요한 바오로의 눈 맞추기>가 씌어진 것이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눈 맞추러 온 이/ 그대/ 수륙 만리에 수륙 만리의 눈 맞추기/ 만 사람이라도 만 사람과의 눈 맞추기/ 은은한 달빛처럼 은은한/ 순간이라도 영원한 길이의 눈 맞추기/ 가진 자에게 가진 것이 자랑일 것 없다는 /말의 눈 맞추기/ 비어 있는 자에게 비어 있음이 비어서 서러운 것/ 아니라는 말의 눈 맞추기/ 성한 이에게 성해서 멀쩡한 것 아니라는/ 말의 눈 맞추기/ 병든 이에게 병으로 어쩔까 어쩔까/ 괴로움 안에만 길이 허우대는 것/ 아니라는 말의 눈 맞추기......(후략)”

세미나가 끝난 뒤 회식 자리에서 이형기 시인은 “교황의 눈 맞추기의 말을 상상으로 헤아려 나간 대목이 좋아요”라 했다. 필자가 교황의 초대에 응한 인사들의 검색대 앞 긴 대열에는 김춘수와 구상 시인 등의 문인들이 많았었다고 했더니 “그날 김춘수 시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데도 초청을 받아 검색대에서 기다리던 이야기를 어느 책의 연재 에쎄이에서 쓴 것을 본 바가 있어요” 라 하는 것이었다.

이형기 시인은 언론 통폐합 이후 직장을 쉬고 있는 때 진주에 잠시 귀향했었다. 만난 사람은 경상대학교 고 빈영호 총장과 경상대 고 강동호 법대학장 등이었다. 이 두 분은 이형기 시인과 같이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빈영호 총장이 학생처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아마도 언론사에서 대학으로 옮기기 위한 일반적 조언을 들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 이형기 시인은 부산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옮겼다가 후에 미당이 돌아간 뒤 그 후임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안착했다. 진주농림에서의 스승인 소설가 이병주는 대학에 있다가 언론사로 옮긴 데 비해 이형기 시인은 언론사에 오래 봉직하다가 후에 대학으로 옮겼으니 선후가 서로 바뀐 것이 재미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병주 교수는 대학에서보다는 소설가로 옮긴 이후에 그가 일제 학병에 끌려간 그 노예적 수치심을 씻어내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자평한 듯하다. 그러나 이형기 시인의 경우는 그 양자간 기울기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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