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손목인, 명곡과 친일의 간극
작곡가 손목인, 명곡과 친일의 간극
  • 경남일보
  • 승인 2019.03.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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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LH 지역상생협력단장)
최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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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가히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명곡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이 특유의 콧소리 창법으로 한국인의 한을 풀어내듯 구성지게 불렀다. 1925년생인 필자의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 노래를 극진히 사랑했다. 이난영은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나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다니다 가정형편으로 중퇴하고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 가서 어렵게 살았다. 타고난 끼를 살려 막간가수로 활동하다 16세 때 삼천리 가극단의 특별단원으로 채용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OK레코드 이 철 사장의 눈에 들어 가수로 데뷔했다. 목포 출신 문일석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한 <목포의 눈물>을 1935년 발표하자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가사는 당시 조선일보와 OK레코드사가 공동개최한 제1회 전국 향토찬가 공모에 당선된 것이다. 목포에는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바로 이 곡을 기념하여 목포 유달산에 세워진 것이다. 예향(藝鄕) 목포는 이 노래를 부른 이난영을 비롯하여 이후 남진, 조미미, 최유나 등 많은 가수들을 배출했다.

손목인(1913~1999)은 진주 대안동에서 유명한 한의사 손세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손득렬(孫得烈)이고 음악활동 내내 많은 예명을 사용했는데 손목인, 양상포, 손안드레, 임원 등이 그것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구가야마 아키라(久我山明), 스에요시 켄지(末吉賢次), 쓰카사 준키치(司潤吉) 등을 사용했다. 일찍이 서울로 이주해서 재동보통학교와 중동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는 음악인생을 살면서 피아노, 아코디언 등 각종 악기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는데 학생시절 갈고 닦은 기량이 밑천이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악극단, 제일악극대 등 공연단체에서 많이 활동하다 해방 이후 악단을 재조직하고 1947년에는 조선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을 지휘했다. 6·25 전쟁 중에는 일본으로 건너가(밀항설도 있다) 1957년 7월 귀국할 때까지 음반발매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손목인은 해방 전후 한국가요계에 큰 산맥을 이룰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작곡했다. 울산 출신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 <짝사랑>, 작곡가 김해송(이난영의 남편)이 발탁한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 이난영의 <해조곡), 원산 명사십리 출신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 해남 출신 매혹의 저음가수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마도로스 박> 등이 히트곡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 외 <사막의 한> <슈샨 보이> <모녀기타> <뗏목 이천리>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일본 활동 당시 1955년 구가야마 아키라(久我山明)라는 예명으로 작곡한 <카스바의 여인>은 일본 엔카(演歌)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술집, 밤의 여인의 애환을 슬픈 곡조로 풀어낸 작품이다. 패티김의 한국어 버전이 있는데 이호섭 작곡 윤희상의 동명 노래는 전혀 다른 곡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손목인을 기리는 심정은 착잡하다. 그는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고 음악인의 권익향상을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의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후 군국주의를 미화한 노래를 많이 작곡했는데 대표작은 <총후(銃後)의 기원(1937)> <보내는 위문대> <봄날의 화신> <참사랑(1943)> 등이 있다. 1943년에는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인 부민관에서 음악극 <아세아교향악> <간첩은 살아있다> 등을 총지휘했다. 1944년 2월에는 산업전사위문격려대 대원으로 참가하여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했다. 충절의 도시 진주에 걸맞지 않는 변절의 대가는 혹독하지 않았다. 광복 후의 행적에서 과오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았다. 대중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한 거장의 뒤에서 어슬렁거리는 친일의 망령, 후손들의 복잡한 심경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친일과 예술의 간극(間隙)은 여전히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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