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57)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57)
  • 경남일보
  • 승인 2019.03.28 1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주의 문인들, 그 중에 평론가 송희복(2)
소월 시 진달래꽃 해설이 궁금하다
소박 맞은 숙모가 안쓰러워 쓴 시인가
송 시인은 ‘사뿐이 즈려밟고 가신 걸음’
분분한 해석에 ‘짓밟다’를 한줄 보탰다
이번에 낸 송희복의 현대시 해설집 ‘불꽃 같은 서정시’는 유사 해설집 기존의 책들보다 연구의 깊이가 깊고 넓다. 52편의 일제하 서정시편들을 5부로 나누었는데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 ‘한국어의 발견과 가능성’,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다’, ‘삶의 관조, 눈부신 명상’, ‘몽상, 혹은 환각의 체험’등이 그것이다. 사랑, 언어, 시대, 명상, 환각으로 이어지는 분류가 시적 보편성의 단계를 짚어준다.

그 중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어떻게 해설했는지 긍금하다. 우리나라 사람 치고 김소월과 <진달래꽃>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김소월의 이 시는 김소월이 제 입으로 말하는 시는 아니다. 특정 여인이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이별을 하며 떠나는 사람에게 꽃을 뿌려 축복한다는 것인데 그 뿌리는 사람쪽이 여자일 시 분명하다. 그래서 화자가 여자일 터인데 누구일까요?

알려져 있기로는 소월의 숙모격인 분이 소박을 맞았는데 소월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이 시를 썼다는 것이다. 송교수는 이 여인을 소박데기라 하고 상대방이 역겨워 할 정도로 얼굴이 못생겼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하지만 마음씨만은 여간내기가 아닌 것으로 본다. 여기서 송교수는 이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내비친다. 이른바 오늘날의 시대적 감수성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매양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가치관을 조정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송교수는 시에서 ‘즈려 밟고’ 해석의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첫번째로 이희승이 말한 ‘재겨 디디다’(발끝이나 발뒤꿈치만으로 디디다)가 있다. 두 번째는 이숭원이 말한 것인데 앞과 동류이지만 우아하게 사뿐히로 본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지레(미리) 밟고’의 뜻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는 김종길 교수의 정주 지역어로 볼 때 ‘힘 주어 지그시’가 맞다는 주장이다. 다섯 번째는 ‘짓눌러 디디다’는 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송교수의 ‘짓밟다’설을 소개한다. 윤동주의 원고 표기에서 ‘짓밟다’와 ‘질밟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서 ‘짓밟다’ 설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송교수는 시에서 뜻보다는 소리에 힘을 주어야 하는 사례로 중국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를 예로 들었다. “나는 듯이 곧게 흘러내리는 물이 삼천자나 되고/마치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린 게 아닌가” 라는 과장이 맘에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중국 최고의 시가 될 수 있는가. 그 신비는 소리에 있어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운율의 언덕을 넘어 들어온다는 것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를 번역하는 것은 뜻으로만 전달한다는 노력으로는 본시의 아름다움을 절대 드러낼 수 없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 송교수는 최근 신문 칼럼에 나 있는 프랑스 아동들의 시 외우기를 소개했다. 프랑스 아이들은 암기라면 질색을 하지만 시 외우기에 있어서만은 매우 익숙해 한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시 암기를 단순히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시를 통해 ‘심장으로부터 배우다’ ‘심정으로써 배우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송교수는 해설 끝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시편 <진달래꽃>을 통해 우리는 한이니 슬픔이니 하는 음습한 정서의 여분을 되새김질 할 것이 아니라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은 우리 말소리의 결과 마디를 한껏 느끼면서 쓰다듬어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대목에 이르자 필자의 중학교 시절 국어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박목월의 <청노루>를 순번 대로 몇 시간이고 간에 줄줄이 낭독을 시켰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교재연구를 하지 않아서 학생 낭독으로 때우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시간에도 그 다음시간에도 그 낭독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 짧은 시는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에 들어와서 앉았다. “먼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 구비를 / 청누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몇 시간 하니까 아이들은 시를 다 외우고 골마루에서 운동장에서 동작 하나에 ‘먼 산’ 동작 또 하나에 ‘청운사’ 하며 신나게 놀았다. 시는 이렇게 어느새 신나는 말로 신나는 말마디로 흘러다녔다. 송교수가 필자의 이 예를 들으면 뭐라고 말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