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58)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58)
  • 경남일보
  • 승인 2019.04.0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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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문인들, 그중에 평론가 송희복(3)

송 교수는 윤동주에 관심을 두어
‘윤동주를 위한 강의록’을 펴냈다
일기를 쓰듯 시를 쓴 시인의 인생에
‘삶이 없는 시가 없다’고 답을 썼다
송희복 교수는 최근 4년간 윤동주 시인에 대해 적잖이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에 작년 연말에는 ‘윤동주를 위한 강의록’을 출간했다. 송 교수는 이 저서 ‘독자를 위하여’라는 머리말에서 저간의 관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2015년 되던 해에 ‘해방 70주년 윤동주 7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강단에서 몇 차례 윤동주를 가르쳤고, 아무 월간지의 편집위원으로서 이에 관한 특집을 두 차례 기획했다. 2016년에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 ‘동주’가 영화관 안으로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였을 때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게 하고 또 감상문을 쓰게 했다. 이 강의 계획은 내 수업을 듣던 학생이 거의 모두 동참했다. 윤동주에 관한 열기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편승하면서 탄생 100주년이던 2017년에 이르러 한껏 고조되었다.”

교수가 강의록을 공개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윤동주 연구를 다각적으로 수행했다는 뜻이 있을 것이고, 둘째로 강의 내용을 대중에게 읽혀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뜻이 있을 것이고, 셋째는 윤동주 시가 갖는 시대적 의미를 확인하는 뜻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송 교수는 진주교육대학에서 이 강의를 하면서 강의록이나 강의 소감문 등을 남기게 했다. 학생들의 관심도와 마음 가짐은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여학생의 잘못된 기록이 흥미로왔다는 것이다. 송 교수가 “시인 윤동주는 서른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여운과 파문을 남겼지만 나는 늦은 나이에도 이렇게 시퍼렇게 학생들에게 그를 가르치고 있다….”라 했는데 한 학생은 그때 스마트폰에 기록하기를 “그 시퍼렇게를 ‘시끄럽게’로 적었다는 것 아닌가. 내 발음이 부정확했을까, 그 학생이 오해했을까”라는 송 교수의 익살이 더 재미 있어 보인다.

이 강의록은 제1강에서 제9강까지 이어진다. 제1강은 ‘슬픈 천명, 가슴 시린 생애’, 제2강은 ‘윤동주의 습작시에서 그의 성장기를 엿보다’, 제3강은 ‘동(冬)섣달 꽃 같은 청년시인, 연심을 품었다’, 제4강은 ‘윤동주 시에 나타난 공감과 예감에 대하여’, 제5강은 ‘윤동주 시에 나타난 자아 이상과 부끄러움에 대하여’, 제6강은 ‘점성술의 관점에서 바라본 윤동주의 시세계’ 제7강은 ‘일본에서 보낸 마지막 3년:동경, 교토, 후쿠오카’, 제8강은 ‘동주와 일주:형제의 우애를 이어준 동심’, 제9강은 ‘에필로그, 모국어를 지킨 함흑기의 별’ 등이다. 대체로 성장기 순으로 정리되고 있다.

송 교수는 제1강에서 먼저 학생들에게 작가와 작품 둘 중 어떤 것이 중요하냐고 물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을 정해 놓고 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을 안 든 사람이 일부 나왔다. 이들은 둘 다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송 교수에게는 하나의 답이 있었다. “윤동주에게는 삶 없는 시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인의 삶이 일기장처럼 일기 쓰듯 시를 쓴 사람이 윤동주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송 교수는 ‘윤동주의 삶을 담은 최초의 글’은 북간도 고향집에 세워진 윤동주비문이라 말하고 그 한문 문장을 풀었다. 비문을 쓴 이는 김관석으로 아버지 윤영석의 친구이자 윤동주의 소학교 시절 은사였다. 앞에는 ‘시인윤동주지묘’라 쓰고 본문은 다음과 같았다.

“어찌 뜻했으리요. 배움의 바다에 물결이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 성공할 생애가 새장 속의 새와 같은 딱한 처지로 변하고 게다가 병의 정도가 심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영원히 떠나가니 이때 나이가 스물 아홉이더라. 그의 재목이 이 시대의 세상에 쓸 만하고 시가 장차 사회에 공명할 수도 있는데 마침내 봄바람이 무정하고 꽃을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 애석하구나 윤동주군은 하현 장로의 손자님이요 영석선생의 아드님으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신시를 지어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자신의 필명도 동주(童舟)라고 하였다.”

이 비에서 ‘시인 윤동주지묘’라 밝힌 것이 필자로서도 눈물겹다. 그것도 대학에 문과를 가지 말고 법과나 의과를 가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동주와 몇 개월간 줄다리기를 했었던 것을 생각해서 그렇고, 문과에 가고 일본 유학까지 갔으나 이렇게 허무하게도 한 줌 뼛가루가 되어 돌아온 아들과 손자를 가족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시인’이라 불러준 그 호칭이 놀랍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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