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서 활동한 하동출신 문영빈 선생 재조명
임정서 활동한 하동출신 문영빈 선생 재조명
  • 최두열
  • 승인 2019.04.09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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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과 배달학회 조직·전 재산 독립자금 지원
임시정부 총무처 활약·동아일보 발기에도 참여
광복 후 공직 요청에 ‘단독정부’ 반발 재야 남아
하동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부 서훈 추진
 
문영빈 선생/사진제공=하동군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4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배달학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 총무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하동 출신 황남(篁南) 문영빈(文永彬·1891∼1961·북천면) 선생을 임시정부 수립 100년 만에 재조명하고 서훈을 추진한다.

9일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해 3월부터 관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추진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시영·여운형 등과 활약한 하동 출신 문영빈 선생의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확인했다.

이번에 문건을 발굴·확인한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당시 언론보도와 선생의 손자 문여황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가 제공한 자료 등에서 선생의 활약상과 백산무역(주)을 통한 독립자금 지원, 한용운 선생이 결성한 만당(卍黨)에서 항일운동 등을 확인했다.

문건에 의하면 문영빈 선생은 1914년 24세에 하동에서 김홍권(양보면·건국훈장), 강한조 선생과 함께 처자를 거느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1915년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배달학회(상해 임시정부 전신)를 조직하고 명예회장에 이시영(李始榮), 외교부장에 여운형(呂運亨), 총무부장직은 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총무처 대변인에 피선됐으나,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자금정조책(資金整調策)을 수립·계획하고 환국했다.

선생은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있던 전답 1000여 두락을 한성은행에 담보해 자금을 마련하고 안희제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을 설립,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로 참여하며 초대 상임 감사역을 맡아 독립운동에 힘썼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 조달 창구역할을 한 회사로, 투자자는 경주의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안희제(의령), 윤현태(양산), 문영빈, 정재완(하동) 등이었다.



 
1918년 11월 3일 매일신보에 문영빈 선생이 백산상회 창립 시 발기인으로 참여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에 이름을 올렸다./사진제공=하동군



선생은 안희제와 함께 지하공작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수색·감금 등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그런 후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백산상회는 1927년 문을 닫았다.

백산상회가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다는 증언은 백범 김구 선생의 입에서 나왔다. 광복 후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언급해 문영빈 선생이 함께했던 백산상회의 독립운동 지원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선생은 1920년 김성수 등 77인과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그리고 1929년 불교계 항일 지도자 한용운이 결성한 만당(卍黨)의 비밀결사에 참여해 김범부, 이기주, 김법린, 최범술과 함께 경남 사천시 곤명면의 다솔사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에 재정 지원을 전폭적으로 했다.

1929년에는 경성 한성은행에 백산상회 공채(貢債)시에 문중과 개인 자산을 담보 제공한 것에 대한 제소로 만 12년간 일제의 은행과 법정투쟁 끝에 1941년 조흥은행(옛 한성은행)과 법정 화해가 성립됐다.

이로써 재산의 일부는 문씨 문중에 귀속케 하고 나머지는 소작인 약 500여명에게 연불상환형식으로 토지를 귀속시켜줌으로써 소위 자작농 창달의 농지개혁을 선행하기도 했다.

하동군 ‘북천면지’에는 1914년 문영빈 선생이 최범술, 조우제, 안명언 등과 만나 지은 송별시가 있다.

선생의 손자 문여황 교수가 찾아낸 이 시에는 ‘한숨의 소리로 촉석루에 오르니/쓸쓸한 가을만 깊어가고/삼장사(문영빈·이극로·최완)의 천년 한이/긴 남강에 흐르지 않고 흐느끼기만 하네’라는 나라 잃은 슬픔이 담겨있다.

삶의 모든 것을 조국 광복에 바친 그에게 친교가 두터웠던 이승만이 광복직후 생가를 찾아와 ‘나라를 세울 테니 학무행정(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청했으나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나라의 독립을 늘 우선시 했던 선생은 분단된 조국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걱정하면서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하며, 남평과 강성의 문씨 대동보(족보)를 만든 후 1961년 71세에 생을 마쳤다.

자료를 제공한 문여황 교수는 “조부께서는 업적에 있어 드러내기를 꺼려하셨다”며 “공을 멀리한 삶에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조부가 타계한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의로운 행적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독립운동 재조명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문영빈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이제야 찾고, 관심을 갖게 돼 죄송스럽다”며 “행정에서 선생의 숭고한 뜻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경남독립운동연구소와 정부서훈을 시급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재상 소장은 “일제의 억압이 서슬 퍼렇던 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목숨은 물론 가문 전체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며 “선생의 위국헌신이 정부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두열기자

문영빈 선생의 생가/사진제공=하동군
문영빈 선생의 묘소/사진제공=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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