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60)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60)
  • 경남일보
  • 승인 2019.04.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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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60)
<220>진주의 문인들, 그중에 송희복(5)

‘시인’으로 송 교수는 여유롭다

‘캐쌈씨로…’되풀이한 사투리에
통 큰 어법에 마음이 놓이는 시다
본업 평론을 두고 시집도 한껏 썼다

송희복 교수는 비평이 본업이지만 시집도 내고 동시집도 내고 소설도 썼다. 에세이는 말할 것 없이 썼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작가들로 볼 때 대형작가이다. 시집으로는 ‘기모노 여인과 캔커피’, ‘저물녘에 기우는 먼빛’, ‘경주의 가을을 걸으면’, ‘첩첩의 겨울산’ 등이 세상에 나왔는데 마지막 ‘첩첩의 겨울산’이 나오자 서울 일원의 시인들 입에서 “송희복 교수 어, 시인으로 알아줘야 하것다”, “이제는 시인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초기에 나온 시편들이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사는 송희복의 이미지는 여전히 비평가라는 자리에 붙박이로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닐 터이다.
송시인은 비평가로서 자기 작품을 보는 입장이 주변 시인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첩첩의 겨울산’에 실린 시 중에서‘벚꽃과 부루스의 봄날’이나 ‘저울질 하지 말라’, ‘진주는’ 등을 꼽지만 시인들은 거기 꼭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에게도 오히려 ‘경주의 가을을 걸으면’에 실린 시편들에서 우수작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대체로 허리를 펴고 어깨에 힘을 빼는 시편들이 부드럽고 여유스런 바가 있다.

그 중에 ‘신문 읽는 아내’가 부드럽게 읽힌다. “복중의 여름날/ 집 안이 후덥지근했다// 아내는 가장 시원한 곳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심심해져/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자기는 신문 보아/ 나는 자기 볼게” 복중에 부부가 집안에서 시간 보내는 한가한 때를 한 토막 잘라서 보여준다. 부부 사이가 참 편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이런 시편은 노숙하여 시적 인내심이 없이도 읽히는 시다. 오늘날 시인들의 본격시로 쓴 것들은 대체로 어렵다. 얼굴에 힘살을 그리며 읽어도 이해가 될동말동이다. 이럴 때 시 읽는 비법은 굳이 시가 갖는 의미를 찾아서 헤매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시인 자신도 무슨 뜻인지 인지하지 않은 채 쓴 시를 두고 무슨 재주로 의미 파악을 할 것인가. 그냥 소리내어 읽든지 말이 갖는 리듬이나 낱말의 감각이 유별난 것이 있나 없나 하고 기웃거리면 된다. 송희복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세는 느슨하다. 여유의 맛을 맛들이게 한다.
다음은 지독한 서부경남 사투리를 쓰고 있는 시를 보자.
“유부남이 유부녀에게 수작을 건다/ 내는 마아 참말로 마음적으로 위해주고 싶은 기라예//캐쌈시로// 마음과 적이 어색하게 결합된 파생어와,/ 위해주다, 라는/ 비표준적인 조어를 사용하며,// 마음적으로 위해 주겠다// 캐쌈시로// 상대방이 동요하거나/ 상대방이 힘들거나 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툭 건넨다// 유부남은 유부녀에게 어색하게 일탈된 어법과,/ 어거지로 발설된 말투로// 좀 밀어붙이듯이 작업을 한다// 마음적으로 위해주겠다// 캐쌈시로/ 캐쌈시로”
시에서 방언이 범벅이 되어 표준말 쓰는 사람들에게는 일정부분 난해할 것이다. 말을 순하게 어법대로 쓰는 토박이 경상도 사람들로서는 질적으로 낮은 말들로 시를 쓴 것이다. 아예 웃통 벗고 시작하는 운동처럼 이런 데서 색다른 말맛이 나기도 한다. ‘쌈시로’를 송교수는 각주를 달고 설명하는데 “되풀이해 말하면서의 뜻을 가진 서부 경남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단에서 경상도 출신 문인들이 많지만 방언을 제대로 쓴 시나 소설을 쓴 문인은 드물다. 박목월 시인이 ‘오매야 머라카노’정도를 썼을 뿐이다. 소설의 경우는 대화에 경상도 방언이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 상식이지만 시나 에세이나 동시 같은 데서는 점잖은 편이다. 송희복 시인은 시인으로 통큰 어법을 보여준 것이다.
송희복의 시 중에 ‘아나키즘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이형기의 시에 관해 말한 시다.
“이형기 선생님 취하시면/ 아나키스트로 자처했다/ 아나키즘 시 한 편 남기지 않으셨다// 이형기 선생님 더 취하시먄/ 아나키스트임을 자임했다// 선생님의 모든 시는 아나키즘 시였다” (아나키즘의 시 앞부분) 송희복 교수의 박사과정 중 은사가 이형기 시인이었다. 시 내용을 보면 이형기 시인이 취중에 ‘나는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고 시를 보면 아나키즘 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형기 시인이 진주농업학교를 다닐 때 교사로 일제때 아나키스트였던 이경순 시인이 계셨는데 그분 호가 동기(東騎)였다. 이형기 시인이 술 취하면 자주 그 선생님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필자도 그런 이 시인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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