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길 선생을 통해 다시보는 진주의 4.19혁명
허만길 선생을 통해 다시보는 진주의 4.19혁명
  • 최창민
  • 승인 2019.04.18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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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학교 학생들 대규모 평화적 시위
시민 합류로 5000여명으로 불어나
“민주주의 숙명처럼 지켜가야 할 유산”
1960년 3.15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19는 학생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로 이어졌다.

제4대 대통령 선거일인 3월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사체가 4월 10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다음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급기야 19일 “이승만 하야, 독재정권 타도”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무력으로 시민들을 저지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4.19 당시 진주지역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당시 진주사범학교(초등교원 양성국립고교)학생회위원장이었던 허만길 선생(서울 거주)은 최근 본보에 진주의 4.19학생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는 진주의 4.19학생운동에 대해 “학생, 시민 50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였음에도 평화적으로 진행됐다”며 “사상자 없이 3·15부정선거의 부당성을 시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렸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시위 도중 경찰서장을 찾아가 면담하고 전후 상황을 전한 뒤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주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총을 든 삼엄한 경찰경비 속에서도 양측의 충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연도의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점을 들며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드러냈다.

허 선생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날을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전으로 기억했다.

이 대통령이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께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날은 24∼25일로 추정된다.

본보는 사실 확인을 위해 1960년 4월 경남일보기사를 검색했지만 22∼30일까지 약 10여일간 신문이 망실됐음을 확인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경위를 조사했지만 인위적인 훼손인지 실제 망실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유독 그 시기의 신문이 사라지고 없는 것에는 다소 의구심을 갖게 했다. 이와 관련 허 선생은 “설창수 경남일보 대표가 쓴 사설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신문이 없다고 하니 의아하다”고 했다.

당시 진주지역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기사는 4월 21일자 이전에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고 대규모시위가 잇따랐던 마산과는 달리 진주의 시위기사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은 것도 알 수 있었다.

진주사범 학생위원장이었던 허만길 선생은 진주시내 고교 운영위원회 간부들과 사전 만남을 통해 시위계획을 짰다.

진주사범학교 진주농림고 해인고 진주고, 진주여고 5개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번화가이자 ‘재판소’로 불렸던 법원로터리(현 롯데인벤스)와 진주극장(현 매가박스진주)에서 시위를 벌였다.

24일 혹은 25일로 추정되는 이날 학생들은 같은 시각에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중심 시가지를 향해 질서 정연하게 출발했다. 허 선생을 비롯한 시위대는 진주경찰서에 이르러 류사원 경찰서장(제22대 총경 1959.7.31~1960.5.12)과 면담을 요청했다. 현관에는 무장한 경찰이 에워싸고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학생들은 류 서장에게 “나라와 국민, 진주를 위한 일이다. 학생들의 생명에 위협이 없도록 해달라”며 일종의 ‘발포금지’를 요청했다.

류사원 경찰서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이들은 북쪽 비봉산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진주여고 등 시위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진주중학교, 법원 로터리를 거쳐 진주극장 앞에 총집결했다. 중앙시장 상인들이 합세해 시위대 규모는 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놀라운 일은 이때 벌어졌다. 도로 변 많은 시민들이 시위대를 향해 두 팔을 들어 “만세”를 외치면서 찬사를 보낸 것이다. 버스에 탔던 시민들도 내려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허 선생과 학생,시민시위대는 이 자리에서 시위의 목적과 당위성을 담은 이른바 ‘시국 선언문’을 목청껏 외쳤다. “학도여! 저 푸른 하늘을 향해 마음껏 소리 높여 봅시다. 이제는 우리 대한 국민, 우리 배달민족이 스스로 새 길을 찾아 나섰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진주지역의 대규모 궐기 하루 혹은 이틀 뒤인 26일 오전 10시 20분, 자유당 12년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4.19혁명의 사망자는 186명, 그 중 대학생이 22명, 고등학생 36명이 포함됐다.

허만길 선생은 “경찰의 무력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줄기는커녕, 중소도시인 진주 등지에서도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자 이승만정권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야했다”면서 “우리의 학생운동이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역할을 한 것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대대손손 영원토록 숙명처럼 지켜가야 할 아주 소중한 유산”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선언문

학도여!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 높여 봅시다. 인제는 우리 대한 국민, 우리 배달민족이 스스로 새 길을 찾아 나섰다고.

동포여!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와 민주와 정의와 평화를 반드시 우리 손으로 찾아, 자손만대에 물려줍시다. 그래야만 애국, 애족으로 몸 바친 뭇 선열들도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우리의 핏속에는 민족의 뜨거운 정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정기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학도여, 그대는 이 나라, 이 겨레의 젊은 기둥이니, 꿋꿋한 기상과 기백을 먼저 민주주의를 위해 고결하게 펼쳐 달라”고.

학도여!

조국과 민족의 자유와 민주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고귀한 생명을 바치고 있음을 어찌 듣고만 있으리오.

학도여! 동포여!

조국과 민족의 새 길이 창창히 열릴 때까지 쓰러진 동포에게 따뜻한 동포애를 발휘하면서, 우리의 의로운 길을 굳세게 굳세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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