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독립운동 성지를 뜨겁게 달구는 박시춘
[아침논단] 독립운동 성지를 뜨겁게 달구는 박시춘
  • 경남일보
  • 승인 2019.04.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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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한국토지주택공사 지역상생협력단장)
최임식LH단장

박시춘(1913~1996)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예술인이다. 작곡뿐 아니라 기타, 바이올린, 색소폰, 트럼펫, 피아노 등 각종 악기를 연주했다. 영화에서도 제작자, 감독, 배우 및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의 수많은 히트곡은 한국 가요사에서 높고 두터운 산맥을 이루고 있다. 1981년 어느 조사에서 선정된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악 100곡 중 10곡이 그의 작품이었다.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는 박시춘을 ‘우리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고 했다.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가거라 삼팔선>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우중의 여인> 등 대중의 귀에 익은 그의 히트곡은 끝이 없다. 나이 69세이던 1982년 대중음악 창작인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본명이 박순동인 박시춘은 밀양에서 권번(券番)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눈을 떴다.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인 중고제 이동백과 동편제 송만갑의 창을 직접 들었다. 이화중선, 김창룡도 어린 그의 음악혼을 흔들었다. 가세가 기울자 11세 때 가출하여 순회공연단에 참가, 만주, 일본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배웠다. 그의 천재성은 1935년 <희망의 노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악단활동을 하고 1947년 조직된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의 지휘를 맡았다. <가거라 삼팔선> 등 동족상잔의 비극을 노래한 작품과 함께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용사> <전선야곡> 등 진중가요(陣中歌謠)도 많이 작곡했다. 1958년에는 영화감독으로 <삼등호텔> <딸 칠형제>를 제작했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1966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3000여곡을 작곡한 박시춘의 화려한 명성 뒤에 아른거리는 친일의 행적 때문에 그의 예술을 즐기는 국민의 심정은 매우 복잡하다. 박시춘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현재까지 13곡의 일제 군국주의 가요가 확인된다. <고성(古城)의 달> <아들의 혈서> <진두(陳頭)의 남편> <결사대의 아내> <지원병의 집> <혈서지원> 등이다. 최병호,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장세정 등 당대 최고 가수들이 그의 친일가요를 불렀다. 이외에도 산업전사격려 위문예능대에 참여하고 일본군 지원을 격려하는 영화와 미영격멸(米英擊滅)을 위한 연극제의 음악을 작곡했다.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하기 위해 발표된 <혈서지원(血書之願)>에는 ‘무명지 깨물어 붉은 피를 흘려서/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네/’라는 가사가 있다.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다.

이들 3명은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고향인 아산, 밀양, 진주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가요제 명칭을 빼앗겼다. 2002년부터 시작된 박시춘가요제는 불과 2년만에 밀양아리랑가요제로 바뀌었다. 밀양시와 KBS가 공동주최하는 이 가요제는 신인가수 등용문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올해 제18회를 맞는다. 가요제에서 이름을 빼앗긴 박시춘은 현재 밀양시내에 동상과 가요비로 건재하고 있다. 밀양시는 현재 사업비 약 30억원을 투입하여 가요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밀양 출신 대중음악인은 박시춘을 비롯하여 작곡가 정풍송·박정웅, 작사가 월견초, 가수 은방울자매 등이 있다. 가요콩쿠르에서 은방을자매를 발탁한 이는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다. 정풍송은 홍민의 <석별>, 조용필의 <허공> <미워미워미워>를 작곡하고 KBS가요무대 주제가를 작사·작곡했다. 박정웅은 한세일의 <모정의 세월>,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을 작곡했다.

친일파가 포함된 가요박물관을 건립하는 밀양은 독립운동의 성지로 자부하는 도시다. 밀양은 지금 이 문제로 매우 뜨겁다. 한국 친일파 후손 1177명에게 민족에게 사죄할 의사를 물었는데 3명만이 사죄의사를 밝히거나 사죄를 했다. 박시춘의 후손은 가요박물관이 들어설 경우 선친의 친일행적을 사과하고 유품을 기증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과하지 않았다. 후손의 사과, 유품기증, 친일행적 표시를 전제로 한 기념관 건립 주장과 사업계획 자체의 철회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의 예명 시춘(是春)은 늘 봄이라는 뜻이다.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남겨준 박시춘에 대한 밀양시민의 현명한 선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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