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살 어르신 나무도 봄날은 늘 청춘
500살 어르신 나무도 봄날은 늘 청춘
  • 김지원 기자
  • 승인 2019.05.07 1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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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일대 ‘노거수와 마을 숲’ 기행
경상대학교 출판부 북로드 첫 기획
정계준 교수, 나무이야기 해설 속
참가자들 봄날의 초록 숲길 즐겨
당항리 느티나무, 도 기념물 199호


오전 8시30분. 경상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숲 기행버스는 10분만에 정계준 교수의 정원에 도착했다. 경상대학교 출판부에서 마련한 첫번째 북로드 ‘노거수와 마을 숲 기행’의 출발점이다. 정 교수는 이번 숲 기행의 배경이 된 책 ‘노거수와 마을 숲’의 저자다. ‘노거수와 마을 숲’은 경남지역에 많이 남아 있는 노거수(수령이 오래되고 큰 나무)와 마을 숲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어야겠다는 집념으로 정 교수가 수년간 발품을 들여 찾아나선 경남일대 노거수와 마을 숲 등의 기록을 생생히 담고 있다.

 
정계준 교수 본가 정원 바닥은 새우난으로 가득하다.


새우난과 만병초가 피는 정원
정 교수의 정원은 멀꿀덩굴이 드리워진 아치가 참가자들을 맞았다. 으름덩굴과 식물인 멀꿀은 하얀 꽃이 무리지어 피는데, 가을에 적갈색으로 익은 열매는 단맛이 아주 좋아 제주도에선 ‘멍꿀’이라고 한단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진 정원 바닥에는 새우난이 융단처럼 깔렸다. 꽃집에 가도 비싸게 취급되는 새우난이 지천이라니. 정 교수는 안그래도 딸의 도움으로 새우난을 온라인으로 판매해 용돈벌이가 쏠쏠하다고 웃음을 띄었다. 정원 바닥에는 틈틈히 명이나물로 유명한 산마늘과 천남성도 눈에 띄었다. 정원 곳곳에는 사모님이 혼수로 가져온 나무를 번식했다는 철쭉과 비슷한 생김새의 만병초가 주먹만한 분홍빛 꽃을 자랑하고 있었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수목과 화초가 한창 제 빛깔을 뿜어내는 통에 참가자들이 어질어질한 발걸음을 옮겨간 아래엔 매발톱 하나가 목이 꺾여버렸다. 장미의 원화 중 하나라는 인가목과 제철 만난 꽃분홍 모란 사이로 미스김라일락이 보라빛 향기를 뿜어내는 정원에서 사모님의 녹차 한 잔을 얻어마시고 숲 기행객들은 서둘러 남해로 발길을 옮겼다.

 
미스김라일락
남해 죽전마을 비자나무. 도 기념물 200호. 수꽃이 피어있다.
남해 죽전마을 비자나무. 도 기념물 200호


비자나무는 자웅동주인가 자웅이주인가
남해 당항리 비자나무. 마을 안쪽으로 난데없는 탐방객이 몰려들자 사발이를 타고 나오던 어르신이 궁금해 한다. 참가자들이 “나무 보러 왔어요”하자 어르신이 저 아래 있다며 길안내를 보탠다. 나무로 이름난 동네답다. 골목 안쪽 작은 다리를 건너 개울가에 우뚝 솟은 비자나무와 만났다. 주변에 큰 나무가 없어 옆으로도 위로도 제멋대로 자랐다.

본가 정원에서부터 시작된 정 교수의 해설이 다시 이어졌다. “비자나무는 자웅이주라고 알려져 있는데, 집에서 자라던 나무를 보니 이게 아니더라. 수꽃이 핀 나무에서 열매도 열린다”는 거였다. 당항리 비자나무는 지금 가지끝에 한창 수꽃이 피어 있다. 그런데 발 아래에는 지난가을 열린 아몬드 모양의 열매가 뒹굴고 있어 자웅이주라는 기존 설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가까운 곳에 당항리 느티나무가 있다. 둘 다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우람한 덩치에 신록이 한껏 물오른 느티나무는 마을 앞 수호신처럼 자리를 지키고 섰다. 느티나무 아래에선 사람이 장난감 같은 크기가 되는 묘한 스케일이 드러났다.

 
구미마을 숲(느티나무, 팽나무)


무환자나무 열매 염주 만들기의 애환
바닷가에 위치한 구미마을 숲은 방풍림이다. 해안변을 따라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심어져 바다에서 태풍이 불거나 큰 바람이 오는 경우 마을에 직접적으로 들이닥치지 않도록 1차적으로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숲의 나무들은 널판지 같은 줄기가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판근이 발달되어 있다. 센 바람에 맞서 몸을 지탱하기 위한 나무 스스로의 요령이다. 두서너 겹으로 사람 몸체만한 나무들이 엇갈리게 해안을 감싸고 있어 바다에서 오는 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마을 집들이 이 숲과 바로 인접해 있는 등 개발의 흔적이 보인다. 그 탓에 잘려나간 나무도 여럿이었을거라는 정 교수의 말이었다. 키 큰 나무들 속에 무환자나무도 섞여 있는데 이 나무의 열매는 염주는 만드는데 애용된다.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염주를 만드는 일도 예사 일이 아니다. 정 교수는 “이걸로 집사람 염주를 하나 만들어 줬다. 스님들이 이 열매로 만든 염주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며 “구멍 뚫기가 엄청 어렵다. 드릴을 썼다가는 큰일 난다”고 했다. 정 교수는 “108개나 뚫어야 했는데…”라며 미소를 지었다.

한창 제철을 맞은 멸치쌈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식당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만, 예약 단체손님으로 곧장 안내받으니 순식간에 밥상이 차려졌다. 해초 곁들여진 쌈밥 밥상에 양념한 멸치조림이 나오자 너도나도 한그릇 뚝딱 하고 다음 여정을 이었다.

 
방조어부림에서 수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계준 교수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


바다길인지 숲길인지 그저 좋은 길
오후 일정은 그 유명한 물건마을 방조어부림이다. 숲과 인접한 주차장 대신 건너편에 차를 대 의아했더니 여기가 숲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 일부러 세웠단다. 정 교수가 앞장 서서 숲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때마침 휴일이라 일반 관광객도 많았는데 나무 해설 탓에 탐방로 정체가 극심해지고 말았다. 팽나무 이팝나무 말채나무가 줄줄이 소개되고 으름덩굴, 토종 아이비, 쥐똥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와중에 탱자나무 한그루가 나무 그늘아래 비실비실 자라고 있다. 정 교수는 “탱자나무는 햇빛을 참 좋아하는데 여기 그늘에 잘 못 자리 잡아서 지금 시들시들 하다”며 말라 비틀어진 하얀 꽃을 가리켰다.

약초나 나무에 조예가 있던 참가자들은 미처 정 교수에게 답을 듣지 못한 질문에 연신 답변을 해주느라 숲 기행의 문답은 그칠줄 몰랐다. 다만 숲 속에 지천으로 핀 하얀 꽃만은 강활이다, 사상자다, 미나리 종류다라며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다. 여러사람을 거치자 사상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사상자.


방조어부림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쾌적한 바람이 가득했다. 이처럼 숲 길을 따라 바람길이 날 수 있어 최근 미세먼지로 인한 고민이 깊어지는 도시에서도 ‘도심숲’과 ‘바람길’ 조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숲길을 다시 되짚어 버스에 오르자 새참으로 유자와 무화과가 들어간 빵을 한봉지씩 건넨다. 이 동네 명물 빵집 르뱅스타 독일빵집의 시그니쳐 메뉴 ‘유자슈톨렌’이란다. 상큼한 맛이 일품이다.

나무의 왕이 있다면 창선도 왕후박나무
남해에서 마지막 코스는 창선도 왕후박나무다. 정 교수는 “남해에서 제일 유명한 나무”라며 실은 “왕후박나무에서 왕자는 학술적으로 의미 없고 예전에 그렇게 이름이 붙어서 왕후박나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보다 하고 도착했더니 웬걸 ‘왕’를 당당히 붙이고도 남을만한 커다란 후박나무가 우리를 맞았다. 수령 500년은 너끈히 넘는다는 이 나무는 배경의 바다풍경과 사이에 다른 큰 나무 한 그루 없이 홀로 임금님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갓 피는 후박나무 잎은 꽃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붉은 빛과 노란빛이 도는 새싹은 꽃잎 처럼 돌돌 말려서 난 후 초록색으로 펼쳐진다.

우람하고 거창한 왕후박나무를 한참 올려다보다 남해 숲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유가 있구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창선도 왕후박나무, 천연기념물 299호
창선도 왕후박나무


명이나물 생각에 산마늘을 품고 집으로
버스는 돌아오는 길에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들러 인공적으로 만든 굴항을 둘러싼 나무를 마지막으로 감상하고 출발지로 돌아왔다. 마지막 종착을 앞두고 버스 안에서 벌어진 경품이벤트에선 나무와 식물에 관한 책이 선물로 주어졌다. 경품을 못받은 참가자들도 아쉬울 일은 없다. 정 교수가 댁에서 일일이 포장해 온 산마늘 순을 5포기씩 모든 참가자들에게 분양했다. 채집시절 농부의 본능이 깨어나기라도 한 듯 저마다 산마늘을 키울 꿈을 안고 나무와 함께 한 하루를 푸르게 마감했다.

김지원기자 goodnews@gnnews.co.kr
 

남해 물건마을 방조어부림 속으로 들어가는 숲 기행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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