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플러스(219) 지리산 뱀사골
명산플러스(219) 지리산 뱀사골
  • 최창민
  • 승인 2019.05.09 1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할머니소나무로 부르는 와운마을 명품 천년송
그 풍경은, 지독한 몸살로 앓아누웠던 유년의 꿈속이었을 것이다. 잘못 먹은 약에 취해 사경을 헤맬 때 떠오른 환상이거나 헛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풍경은 이랬다. 깊은 산중 작은 마을이었다. 대여섯가구의 초가지붕 위로 강한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햇살이 비치는 대지는 온통 황금빛으로 변해있었다. 야트막한 앞산에는 거대한 소나무 한 두 그루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언뜻 나무 아래에는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던 것같다. 심산, 작은 마을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 풍경의 기억은 후일 어느 봄날 늘어진 낮잠 중에도 나타나 여러가지 형상으로 뒤섞이면서 기이한 환영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푸름이 장막을 친 산에 나무는 보이지 않고 물고기가 헤엄을 친다든지, 땅 위를 걷는데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다든지, 늙은 지게꾼이 농사일에 분주한데 딱따구리는 하루 종일 토닥거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런 풍경의 그림을 도시의 늦은 밤 신축아파트 입구 공터에서 본적이 있다.

그리고 또, 이런 풍경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리산 깊은 계곡의 작은 마을, 구름도 힘이 들어 누워서 넘어간다는 와운마을이 그곳이다.

와운마을은 지리산 뱀사골에 위치한다. 그곳에 가려면 물줄기를 두세번 건너고 골짜기 옆을 걸어서 언덕을 치오르면 거짓말처럼 이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 있고 동산이 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있으며 영험한 할머니소나무가 공존한다. 어디선가 본듯한 광경, 꿈속의 풍경과 닮아 있다. 이번 주는 천년송이 하늘로 치솟아 자라는 지리산 뱀사골 와운(臥雲)마을이다.

 
▲등산로: 뱀사골입구 주차장→반선교→지리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계곡 데크로→요룡대→탁룡소→뱀소→병풍소(반환)→와운마을→천년송(반환)→요룡대→지리산전적기념비→뱀사골주차장 회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 뱀사골’이라는 선전 글귀를 달고 있는 반선교를 건넌다.

‘반선’이라는 지명은 완전한 신선이 아닌 ‘반 정도만 신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본래 반산이었는데 신선이 승천하지 못하고 반만 신선이 됐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이곳을 거닐면 누구나 반은 신선이다.

왼쪽에 소·담과 폭포, 산과 하늘, 바위와 철쭉이 어우러진 지리산 최고의 계곡, 뱀사골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다. 와운마을 천년송까지 3㎞, 화개재까지 9㎞에 달하는 길고도 깊은 계곡의 서막이다.

100여명에 달하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수원의 하이텍고교 학생들로 체험학습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반갑습니다”를 연발하며 밝게 인사하는 학생들의 재잘거림과 계곡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기분 좋은 화음을 만든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른 물이 담겨 있는 큰 소와 작은 소가 번갈아가며 발밑으로 지나간다. 재미있는 소 이름 하나, 옛 사람들에게도 멧돼지가 멱을 감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던 모양이다. 그래서 돼지의 지방어 ‘돗’을 써서 ‘돗소’라고 부르고 있다.

요즘 암반 사이로 피어오른 진분홍빛 수달래가 장관이다. 녹색 잎에 분홍색 꽃을 피우는 수달래는 물가에 피는 철쭉의 다른 이름, 생명력이 강해 돌틈을 비집고 피어오른다. 소와 폭포를 배경으로 자생하기 때문에 색 대비가 좋아 화가, 사진가들에게 인기다. 이 날도 작가들이 사진촬영에 열중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두 개의 물줄기가 합수하는 지점에 있는 서 있는 요룡대까지 30분 남짓 걸린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군데군데 데크 길이 설치돼 있어 계곡에 내려서서 손에 물을 담그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 볼수 있다. 아무렇게 찍어도 그림이 되는 풍경이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빨리 걸어 다녔는지 절감하게 된다. 요룡대는 마치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흔들바위라고도 하는데 실제 흔들리지는 않는다.

탁용소는 뱀이 허물을 벗고 목욕 후 용이 됐다는 곳이다.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 숨막히게 아름다운 산간계류의 소와 폭포가 다가온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돌면서 머무르다 또 흘러내린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지리산 주능선의 반야봉 아래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 화개재에 닿는다. 그 옛날 화개사람들이 목통골을 따라 뱀사골로 넘나들었다.

와운마을로 가려면 뱀사골 중간 병풍소나 간장소에서 반환해 와운교까지 다시 나와야한다.

와운교 부근에서 임도를 따라 언덕을 넘어 골바위골로 향한다. 와운마을에 닿는다. 신선의 놀이터 선계(仙界), ‘산 높고 물이 깊어 구름도 누워 넘는다’ 는 와운(臥雲)은 ‘험하다’는 표현이요, ‘양지바르고 따뜻해 구름도 쉬어간다’는 누운 골은 ‘평화롭다’는 의미다. 험하지만 평화로운 곳,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멀리, 지리산의 병풍 같은 울타리 골짜기 아래 몇 채의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앞산에 할머니 소나무, 천년송이라고 부르는 명품소나무(천연기념물 424호)가 있다. 이 소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삶에 깊이 자리 잡은 수호신이자 동산목이다. 매년 정월 초사흘 나무에 제사를 올린다. 예부터 태아에게 소나무 바람을 들려주는 솔바람 태교를 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태어난 아이는 바람의 아들, 아니 솔바람의 아들인 것이다.

출산이나 장을 담글 때 치는 금줄에도, 혼례상에도 솔가지를 따다가 꽂는 풍습이 있었다한다. 높이 20m, 둘레 6m, 사방의 폭은 12m다. 20m 떨어진 곳에 할아버지소나무가 있다. 뱀사골머리 명선봉에서 뻗어 나온 산자락에 위치한 이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장엄한 기품을 풍긴다.

1595년 영광정씨와 김녕김씨가 난리를 피해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다 피난처로 최적지라고 생각해 정착했다고 한다. 그들의 이상향이자 샴발라인 셈이다. 아픔도 있었다. 한국전쟁 빨치산 토벌작전 때 지리산이 공비의 소굴이 되자 전 주민이 피난 이주했다가 1954년 수복과 함께 다시 입주했다. 할아버지 소나무에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뱀사골은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를 말한다. 1300년 전 뱀사골 입구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매년 칠월 백중날 스님 한 분을 뽑아 그날 밤 신선바위에서 기도하게 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스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얘기를 들은 한 스님이 기이하게 여겨 그해 뽑힌 스님의 옷자락에 치명적인 독을 묻혀 놓았다. 뒷날 신선바위에는 스님 대신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그동안 사라진 스님들은 승천한 게 아니라 이무기의 제물이 됐던 것이다. 이후 계곡의 이름이 이무기, 즉 뱀이 죽은 골짜기라는 뜻의 뱀사골이 됐다.

뱀사골 입구에 지리산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수·순천사건과 한국전쟁 후 지리산에 숨어든 무장공비와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벌인 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전적을 기념해 세운비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충혼’ 비석이 옆에 있다. 뱀사골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이무기도 승천한 용이 되고, 사람들도 완전한 신선이 될 것이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돗소
천국으로 가는 뱀사골계곡
요룡대
   
철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