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역할’을 위하여
더 많은 ‘역할’을 위하여
  • 경남일보
  • 승인 2019.05.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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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성(대학생·경상대학교)
영화 걸캅스를 보았다. 원래 영화 예고편이나 리뷰를 먼저 살피지 않는 편이라 그저 주변에서 본 친구들이 재밌다고 했던 것을 믿고 극장에 들어섰다. 주말저녁, 관람객들을 거의 채운 작은 상영관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시의적절한 디지털 성범죄, 신종 마약 등의 소재를 풀어낸 것도 괜찮았다. 분명 킬링타임용으로 볼만한 영화였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닌 듯하다. 많은 남초 커뮤니티에 걸캅스는 ‘페미’영화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포털사이트에서는 평점테러를 받고 있었다.

영화 리뷰 다수에는 ‘현실의 여경은 무능하다’, ‘판타지 액션물이다’라는 등의 의견이 많았다. 현실의 여경이 진짜 무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각 개인이 판단할 문제도 아니며 한 영화의 리뷰를 나누는 장에서 나눌 주제도 아니다. 유독 여경의 ‘팔굽혀펴기’를 비난하는 댓글이 많기에 덧붙이자면 경찰 체력시험 측정 기준은 팔굽혀펴기를 제외한 모든 기준이 같으며 만점 기준 또한 100m달리기는 2.5초, 윗몸일으키기는 3개 등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줄곧 우리나라 여경과 비교 하는 미국 여경 또한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으며 어떤 항목에서는 한국 여경의 채용조건이 더 까다롭다. 팔굽혀펴기만을 부각해서 여경이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영화는 굳이 주인공들이 ‘여경’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많이 봐왔던 형사물에 나오는 남경의 모습을 비슷하게 따라갔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들에서 남경의 모습은, 가정에는 무심하고 집안일이나 육아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경찰로써 불의에 맞서 싸우고, 아내들은 묵묵히 남편을 지지한다. 하지만 미영(라미란)은 사법고시 공부를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랴, 아이를 키우랴 강력반 형사로의 삶을 한 수 접고 민원실 행을 자처하였다. 맨 처음 등장할 때도 남편과 전화를 하며 아이를 챙기라는 말을 한다. 남경이 주연일 때 이런 대사들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본 한국영화중에는 육아와 가사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접고 일선으로 물러나는 남경을 본적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영이 수갑과 총을 쥐며 전설의 형사로 불리던 시절 본능을 떠올리는 것은 한편으로 애처로웠다.

걸캅스를 두고 작품성이 훌륭한 영화라고 치켜세우고 싶지는 않다. 분명 영화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는 B급 감성에 더 가까운 영화라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벡델테스트에 부합하는, 여성주연의 영화라는 점에 의의를 부여하고 싶다. 벡델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이다.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등의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100분이 넘는 러닝타임에서 그게 뭐 어렵겠나 싶겠지만,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여성배우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바로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계에서 여배우가 설자리는 매우 좁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19년 2월 18일 발표한 ‘2018 한국영화 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개봉한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중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국가부도의 날’, ‘도어락’, ‘협상’, ‘허스토리’, ‘치즈인더트랩’, ‘마녀’, ‘상류사회’, ‘스윙키즈’, ‘완벽한 타인’, ‘인랑’ 등 총 10편이었다. 우리나라 남성배우들의 연기력이 특히나 여성배우들에 비해 뛰어나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비단 영화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여배우들의, 더 나아가 이 사회의 여성들이 좀 더 많은 ‘역할’이 될 수 있도록, 걸캅스로 그 문을 두드려본다.
 
이희성(대학생·경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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